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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로 보는 역사의 주인공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바로가기
박자혜 1895 ~ 1943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공적개요 :
  • 3·1운동 당시 '간우회' 회원들을 모아 독립만세 주도
  • 중국 이주 후 국내인사들과의 연락임무 수행
  • 나석주 의사 동척 폭파 의거 당시 위치·자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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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많은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다. 여성가족들은 남편이 혹은 아버지가 하는 일이 과연 내 남편은 한 가정보다도 더 큰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가정 살림을 전적으로 책임졌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갈 수 없었다. 불시에 일본경찰이 들이 닥칠 수도 있었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결국 독립운동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이 후방에서 보급기지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독립운동가이면서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 삶을 살았다. 신채호 선생에 대해서는 독립운동가, 역사가, 언론인으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를 뒤에서 후원했던 박자혜 여사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장기전으로 가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적극적인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신채호의 독립운동은 박자혜 여사의 후원과 지지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궁녀에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박자혜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며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박자혜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박자혜의 부친은 중인 출신이지만 딸을 궁궐로 보낸 것은 가정 경제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입궁한 나이가 9세 정도라면 1900년 이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입궁하자마자 바로 나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견습 나인으로 지내다가 18세 혹은 19세 정도가 되어야 관례를 치른 후 비로소 나인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므로 박자혜는 1900년대 어린 시절을 견습 나인으로서 궁궐에서 보냈던 것이다. 당시는 대한제국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지고 있던 때였다. 대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던 시대였지만 궁궐 안의 생활은 많이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궁녀들은 출신 배경에 따라 왕을 모시는 최고의 신분인 지밀, 바느질을 하는 침방, 자수를 놓는 수방, 요리를 만들고 빨래 등을 하는 세수간, 생과방, 소주방 등에 배치되었다. 지밀, 침방, 수방은 중인 출신, 그 외는 상민 출신들이었다. 박자혜는 중인 출신이었으므로 지밀, 침방, 수방 중의 한군데에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자혜는 궁궐 내에서 자신이 속한 곳의 대대로 전수되는 일들을 배우고 내명부의 체계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삶을 배웠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밀에 배치되면 기거동작, 궁중용어, 한글, 소학, 열녀전, 규범, 내훈 등을 익힌다. 이외에 한글 궁체쓰기 연습도 해야 한다. 침방, 수방에서도 기본적으로 한글, 소학 정도는 공부해야 했으며, 소속 부서의 직무 훈련이 시작된다. 이 두 곳에 배치된 나인은 이후 지밀에 결원이 생겼을 경우 뽑혀 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박자혜가 배치된 부서에서는 반드시 한글, 소학 등의 글공부가 필요했다.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며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궁녀의 신분에 적합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았던 것이다. 박자혜는 거의 10년을 궁중에서 이러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 이곳을 벗어나게 된 계기는 1910년 일제강점에 의해서였다. 


1910년 12월 30일 일제는 황실령 제34호로 이왕직관제를 발표하였다. 1911년 이왕직 업무 개시 하루 전 1월 31일 궁내부소속 고용원 340명, 원역(員役) 326명을 해직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자혜는 궁녀 신분을 벗어났다. 그 후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에 입학했다. 조하서는 3세 때 부모를 잃고 헌종비 명헌 왕후 홍씨전의 제조상궁으로 있던 고모의 소개로 4세 때 아기나인으로 입궁했다. 그 후 1907년 조하서는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이 1907년 12월 볼모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자 근대교육을 받은 궁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덕수궁과 경복궁의 궁녀 16명을 택하여 명신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게 했다. 이중에 한 명이 조하서였다. 그는 7세 때부터 경복궁 명헌왕후 홍씨전에 있었는데, 엄비의 명으로 경복궁 궁녀 7명과 함께 명신여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명신여학교는 숙명여학교의 전신으로 1906년 엄비의 후원으로 이정숙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 박자혜는 조하서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재학 당시의 주소는 북부 북장동 26-8번지이며, 보증인 조하서의 주소와 같다. 박자혜도 이들처럼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교육령과 숙명여학교의 당시 설치된 학과를 봤을 때 박자혜가 입학한 것은 1911년 조선교육령 발표 전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예과는 1908년 고등여학교령에 의거해서 설치되었다. 1912년 제1회 졸업생들은 1910년 4월에 입학하여 1912년 3월 2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박자혜는 제1차 조선교육령 발표에 의해 3년 과정을 마치고 1914년 김원자, 김숙당, 백혜상, 정경자, 엄순향 등과 함께 제2회로 졸업했다. 기예과의 학과목은 수신, 일어독본, 습자, 조선어 급 한문, 산술, 가사, 재봉, 양재, 자수, 조화, 편물, 도화 등이었다. 박자혜는 이러한 수업 과정에서 처음으로 남자 선생님, 일본인 선생 등을 만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을 것이다. 박자혜는 숙명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한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그가 이곳에 입학한 것은 아마도 경제적인 자립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당시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교사와 의료인을 제외하고 직조업, 바느질 품, 마전장사, 유모, 양잠, 홍삼직공, 수놓는 직공, 굴 따는 여자, 기생, 쌀 고르기, 여고원, 연초직공, 광주리장사, 음식장사, 아이돌보기, 길삼, 수모 등이었다. 이러한 직업은 대우가 좋지 못했다. 궁녀라는 것은 전통시대 여성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 박자혜도 궁녀라는 직업을 가졌다가 해고당한 뒤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기예과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본과보다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과가 더 실용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기예과를 졸업해도 전문적으로 일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직조업, 바느질품, 수놓는 직공 등이었다. 이에 비해 산파는 전문 의료인으로서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여성에게 괜찮은 편에 속했다. 나중에 조산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자혜가 선택한 곳은 사립 조산부양성소였다. 이 기관은 유지자의 후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1910년 3월 운영 자금의 문제로 폐지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학생들은 조선총독부의원 산파과로 전학을 가거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만성적인 재정 적자 때문에 항상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유지, 기생조합 등에서 연주 등의 행사를 통해 기금을 모집해 주었다. 개소 초기에 약간의 학문이 有한 17명의 생도를 모집하였으나 응모자가 거의 없었다. 남성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꺼리는 전통적인 여성관 때문이었다. 그러다 점차 산파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좋아지면서 1912년에는 제1회 졸업생으로 7명, 1913년 제 2회 졸업생 6명, 1915년 제 3회 졸업생으로 4명을 배출했다. 박자혜는 1914년 3월에 숙명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하고 조산부양성소에 바로 입학했다면 1915년 제3회 졸업생일 가능성이 크다. 박자혜는 이곳에서 간이 생리학, 간이 산파학, 해부학, 태상학, 간호, 육아, 소독법 등을 배웠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14년 산파 규칙을 반포, 시행에 들어갔는데, 다음과 같은 조항에 해당되는 사람만이 산파가 될 수 있었다. 20세 이상의 여자로서 산파시험에 합격한 자, 총독부의원이나 각도 자혜의원의 조산부과를 졸업한 자로 위원장이 준 조산부 적임증서를 가진 자, 조선총독이 지정한 학교나 조산부양성소를 졸업한 자 등이다. 그래서 박자혜는 조산부 자격증을 얻어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하였다. 박자혜는 어린 나이에 궁녀로 들어가 조선 오백년 동안 전수되어 오던 유교적인 여성관에 따른 마음가짐, 궁녀로서 해야 할 일 등을 배우는 등 전형적인 전통시대 여성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으로 박자혜의 삶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궁녀 선출에 대해서는 조선 오백년 동안 서민들조차 꺼리는 일이었다. 한 번 입궁하면 다시는 나오기 어려웠으며 독신으로 늙어야 했다. 그리고 딸을 일단 입궁시키면 부모는 그 뒷바라지를 해 주어야 했다. 만약 제대로 못하면 문책을 받았다. 혹시 병이라도 나면 궁을 나가야 했으며, 한번 궁녀가 되면 혼인을 할 수 없었다. 박자혜가 궁녀의 신분을 벗어난 후에 다른 궁녀들처럼 여학교의 본과 과정을 밟지 않고 재봉 혹은 수예를 가르치는 기예과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경제적인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조산부양성소 과정을 밟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박자혜가 숙명여자보통학교 기예과를 졸업할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산파규칙을 반포하였다. 그 조항에 의하면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졸업해야 병원에 취업할 수 있었으며, 경성일 경우에는 경무총장, 지방일 경우에는 경무부장에게 신고만 하면 산파 개업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자혜는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산파가 되었다. 당시 산파는 간호부보다 대우 혹은 인식 등에서 더 우월한 직업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산부와 간호부의 양성규정에 의하면 조산부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간호부과를 이수해야만 했다. 박자혜는 궁궐을 벗어나면서 비로소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학문을 알게 되었다. 


간우회 조직과 3.1만세운동의 참여 


박자혜는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졸업한 후에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박자혜가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졸업한 후 곧장 취업했다면 1916년부터 총독부의원 간호부로 근무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간호 실무자, 기타 진료를 지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간호 실무자들 80%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박자혜는 독립에 대한 생각보다는 자신의 생계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근무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간호부로서 하는 일은 투약, 일반처치와 주사, 의사 보조 업무 등이었다. 3년여 이상을 간호부로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라 안에서는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으며,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세운동은 3개월 이상 전개되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에 의하면 3.1만세운동 이후 3개월간 전국에서 전개되었던 집회 횟수는 1,542회였으며, 참가인원은 202만 3,089명이었다. 사망자 수 7,509명, 부상자수 15,961명, 피검자 수 46,948명, 불탄 건물 중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에 이르렀다. 


3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총독부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박자혜를 비롯한 한국인 간호원들은 18명이었으며 한국인 남자 의사로는 내과에 김용채, 산부인과 김달환, 외과 신창엽, 소아과 권희목, 피부과 김형익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구과에는 김영오가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과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느꼈다. 박자혜도 단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이들을 보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꼈다. 자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목사 이필주와 연결되어 간우회를 조직하였다. 어떤 인맥으로 이필주와 연계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박자혜는 함께 근무하고 있는 피부과 의사 김형익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형익은 병원 내에서 열변가로 알려져 있었다. 박자혜는 김형익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노량진 사이를 오가며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다. 3월 6일 근무가 끝난 후 박자혜는 동 병원의 간호사들을 옥상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모임에서 만세운동에 동참하자고 제안하였다. 박자혜와 뜻을 같이 한 간호부는 4명이었다. 독립만세는 3월 10일을 기해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일경은 그를 과격한 말을 하고 다니는 자로 주목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박자혜는 일경에게 체포당했다. 당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만세운동에 책임을 지고 유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간호사들의 신병을 인수하였다. 덕분에 박자혜는 일경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한국인 의사, 직원은 더 이상 이러한 울분을 참을 수 없어 휴업, 병가 등을 핑계로 병원을 떠났다. 내과 김용채는 3월 28일부터 무단 휴무, 소아과 권희목은 3월 30일에 사직하고 병원을 떠났다. 산부인과의 김달환도 3월 24일부터, 연구과의 김영오도 3월 26일부터 휴무에 들어갔다. 외과 신창엽은 3월 5일 사직했다. 박자혜와 뜻을 같이 했던 4명의 간호부들도 부모님의 병을 핑계로 병원을 떠났다. 


박자혜도 더 이상 일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곳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하였다. 그 와중에 만주에 있는 지인이 생각났다. 그에게 길림성에 있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쳐 달라고 했다. 박자혜는 이 전보를 받고 2주간의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 병원 후문으로 빠져 나와 그 길로 서울역으로 가서 봉천행 열차를 탔다. 그는 봉천에서 동래상회라는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던 석운 우응규를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그에게 국내 정세와 망명을 하게 된 경위를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다. 우응규는 박자혜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십 여일이 지난 후 북경의 명망있는 인사에게 연경대학 편입학을 부탁한다는 편지 한통과 노자를 마련해주었다. 박자혜는 즉시 봉천을 떠나 북경으로 갔다. 그리고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신채호와의 만남과 의열단 활동 


박자혜가 연경대학에 입학한 것은 1919년 4월 혹은 5월경이었을 것이다. 신채호를 만난 것은 북경에서 1년여를 지낸 1920년 봄이었다. 신채호는 1910년 4월 국내를 떠난 후 블라디보스톡, 상해, 봉천, 북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3.1만세운동 후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우당 이회영은 민족대표 33인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만든 후 국내를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부인 이은숙은 3.1만세운동과 고종의 인산일을 보고 이회영을 따라 북경으로 왔다. 이회영 가족은 북경의 하다문 밖에 셋집을 얻어서 기거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이동녕, 이광, 조성환, 박용만, 김규식, 김순칠 등이 드나들었다. 3.1만세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 매일 5,6명씩, 적게는 2,3명씩 방문하면서 정보를 교환하였다. 신채호는 이승만이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동휘를 비롯한 상해, 노령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이승만 사퇴운동를 전개하였다. 신채호는 신대한의 주필로 있으면서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사건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이회영 형제의 부름으로 1920년 상해를 떠나 동년 4월 북경에 도착하였다. 신채호는 북경에 오자마자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박자혜를 소개받았다. 평소 왕래가 잦았던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중매를 해 주었다. 신채호는 16세 때 형 신재호가 슬하에 향란만을 남기고 요절하자 집안의 대들보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풍양 조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14년 결혼생활 중 함께 지낸 것은 6, 7년 정도였다. 아들 관일이 우유를 잘못 섭취하여 세상을 떠나자 너무나 큰 상실감에 빠진 신채호는 당장 부인 조씨와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부인에게는 논 다섯 마지기를 장만해주고 친정에 가서 살도록 했다. 이후 신채호는 부인과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서울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1910년부터 10년간을 신채호는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다 1920년 4월 연경대학을 다니고 있던 박자혜를 만난 것이다. 신채호는 박자혜보다 15세나 연상이었다. 박자혜의 나이 24세였다. 박자혜는 신채호와 함께 북경의 금십방가(錦什坊街)의 한 세집을 얻어 가정을 꾸렸다. 신채호는 박자혜에게 가정에 등한한 남편이라며 섭섭해 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박자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21년 음력 1월 박자혜는 첫 아들 수범을 출산하였다. 신채호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는 약간의 원고료, 특지가의 후원 등으로 겨우 면목은 세웠으나 더 이상 가정 경제를 책임질 수 없었다. 항상 신채호가 하는 일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 뿐이었다. 1922년 박자혜가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신채호는 더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부인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 때 박자혜는 5개월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마 두 번 째 아들은 국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둘째 아들 두범은 1927년에 출생하였다. 국내로 돌아온 박자혜는 시내 인사동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연경대학에 다닐 때는 여학생 축구부까지 만들 정도로 활달했지만 경제적 궁핍함으로 남편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가족들이 국내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지내는 동안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다. 박자혜는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가능한 한 독립운동을 지원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나석주의사의 폭탄 투탄사건을 들 수 있다. 나석주는 황해도 재령출생으로 김구의 안악 양산학교 제자이다. 나석주가 천진에서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을 때 김창숙, 김구, 이동녕 등은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폭탄투척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 때 김구는 나석주를 그 실행자로 추천하였다. 나석주는 신채호로부터 폭탄 2개를 받고 유자명, 한봉근, 이승춘 등과 함께 입국하여 거사하려 했다가 자금 부족으로 혼자 실행에 옮겼다. 


1926년 12월 중국 위해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한 그는 중국인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오후 8시 45분행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남대문에서 중국인 여관 동춘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28일 오전 중에 거사 장소인 조선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대한 사전 조사를 끝냈다. 나석주는 서울행이 처음이었다. 아마 나석주는 이 때 박자혜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자혜는 신채호와 계속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석주의 거사계획을 알고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나석주는 조선은행과 동양척식회사로 가서 각각 폭탄 한 개씩을 던졌다. 일경들이 그를 나오자 그들과 대치하면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나석주의 활동 범위는 황해도 재령를 비롯한 서북지역 그리고 상해, 천진 등이었기 때문에 서울은 생소하였다. 이 때 이러한 길을 안내해 사람이 박자혜였다. 이와 같이 그녀는 신채호와 연락을 하면서 의열단 활동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신채호가 일경에게 체포되면서 끝이 났다.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 


박자혜는 신채호와 혼인한 이후 이전과 너무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에 많은 독립운동가 아내들처럼 남편의 독립활동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보급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가정경제, 자녀교육, 남편의 독립활동 내조 등이 전부 그녀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끊임없는 일경의 감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박자혜는 귀국 후 지인의 도움으로 인사동에 방 한 칸을 얻어 큰 아들과 함께 살았다. 부엌도 마루도 없는 방을 얻어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 그녀는 천성이 활달하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여성이었지만 생활고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박자혜는 산파업을 개원했으나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연령에 상관없이 총독부의원과 세브란스 조산과 출신이면 개원할 수 있었으며, 보통 월 사오십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지 않았다. 당시 한국 여성들은 난산일 경우에만 산파를 찾았다. 보통 다른 직업은 일정한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에 할 일을 마치면 되지만 이 직업은 낮밤뿐 아니라 새벽에도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가야 했다. 어떤 산파 여성은 자신도 임신한 상태에서 난산인 여성을 위해 가야만 했다. 영업 간판을 걸고 가지 않으면 신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는 도중에 순산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다시 되돌아 와야 했다. 일반 여성의 몸으로 바람 불고 비내리며 밤서리차고 눈내리는 새벽에 출장가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당시 한국 여성들은 순산을 하면 외부인을 집안으로 들여서는 안 되는 금기 때문에 산파 부르기를 꺼려했다. 난산일 경우에만 산파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산파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지 않았다. 


보통 산파들은 잠자다 끌려와서 산모가 며칠을 기다려도 출산을 못하고 아기와 같이 세상을 떠나면 영업 간판을 떼버리고 싶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순산을 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그 만큼 보람을 느꼈다. 산파들의 수입은 빈부에 따라 차이가 났다. 한번 조산을 도와주면 십원에서 삼사십원까지 받았으나 매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월수입이 일정하지 않았다. 박자혜도 산파 간판을 붙였지만 생계가 걱정될 정도로 영업이 되지 않았다. 간판은 무용지물이었으며 1928년경에는 산파 영업을 하는 곳이 너무 많아져서 열 달이 가도 손님 한 사람 찾아오지를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녀의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 중 사오일에 지나지 않았다.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 끼니를 못 때우는 날이 많아 대련감옥에 있는 신채호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신채호가 &lsquo내 걱정은 마시고 부디 수범 형뎨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 할 수 업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 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 중에도 박자혜는 아들 수범의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겨우 구입해서 교동 보통학교에 보냈다. 아들 수범도 거의 굶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박자혜는 아들 수범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다. 


대련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신채호가 너무 추워 박자혜에게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 해 주지 못했다. 박자혜는 매달 육원오십전 하는 방 한칸의 월세마저도 제때 못 내어 주인의 독촉을 받으면서 살았다. 너무 어려운 생활 때문에 두 번째 딸 아이는 영양실조로 2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산파업이 제대로 안 되어 박자혜는 아들과 함께 풀장사, 종로네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신채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동아일보에서는 박자혜의 생활을 공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전국에서 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왔다. 무명씨 1원, 10원, 강계 동인의원 김지영 10원, 이천군 박길환 5원, 정주군 이승훈 5원 등이었다. 1929년에도 천도교부녀회에서 7원을 동정금으로 보냈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일경들의 감시와 폭력이었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일경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어린 수범을 시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어떤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박자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신문사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큰 아들 수범의 학비를 위해 신채호의 동지, 친지, 친척 등을 찾아 가기도 했다. 박자혜는 일경에게 갖은 욕과 폭력을 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큰 아들 수범은 일경의 간섭으로 선린상고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박자혜가 신채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이었다. 이들은 3, 4일에 걸쳐 북경으로 가는 도중 여관에서 쉬다가 납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신채호를 만날 수 있었다. 세 가족은 박숭병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신채호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어 다시 박자혜와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박자혜는 둘째 아들을 임신한 채로 큰 아들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다. 1928년 4월경 신채호는 박자혜에게 다른 곳에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편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위체 사건으로 대만 기륭항에 도착하기 전 배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감옥에 있는 신채호와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였다. 그러다 1931년부터는 편지마저 끊어져 버렸다. 박자혜는 아마도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31년 옥중에서 신채호는 국조보감과 서양역사책을 사서 보내라고 했는데 값이 오십원이나 해서 박자혜가 안재홍에게 부탁했더니 그도 역시 사서 보내지 못했다. 그 이후로 편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은 너무나 고달팠다. 특히 자녀들이 있을 경우에는 교육과 생계 문제로 더욱 곤란을 겪었다. 박자혜는 어려운 삶을 살면서 신채호의 석방 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신수범 앞으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박자혜는 수범,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떠났다. 신채호를 만났으나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박자혜는 24일 노조마열차로 유해를 싣고 귀국하였다. 경성역에는 많은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진, 홍명희, 여운형, 신석우, 서춘, 안재홍, 김형원, 박돈서, 신상우, 이관구, 정인보, 원세훈, 이대위, 김약수, 현동완, 주익, 유진태, 서정희, 김동완 등이었다. 이중에 원세훈은 청주군 남성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장례식은 신석우 250원, 송진우 50원, 여운형 50원, 조선일보 방응보 20원, 삼천리사 김동완 1,000 등의 부조금으로 지냈다. 박자혜는 천성적으로 활달하고 주장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됨으로써 독립운동을 후방에서 돕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채호의 활동 때문에 일경에게 시달리면서도 자녀 교육, 생계, 신채호의 옥바라지, 중국과 국내 독립운동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 등을 해 냈다. 박자혜가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해 낸 것은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방문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박자혜는 대련이야 오즉이나 치웁겟습닛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라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신채호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신채호가 수감되어 있는 대련 감옥을 향하여 무사히 돌아오기를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현실적으로 그녀는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신채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인제는 모든 희망이 아조 끊어지고 말았읍니다 라는 말에서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독립이었던 것이다. 


1943년 홀로 셋방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다 


박자혜는 어린 시절 궁궐의 견습나인으로 입궁한 후 일제 강점으로 생계를 위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전통적인 여성관을 배우고 성장한 여성으로서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근대교육을 다시 받아야 했다. 그래서 숙명여학교 기예과와 사립 조산부 양성소를 졸업한 후에야 조선총독부의원의 간호부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간호부로 살아가던 그녀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문이었다.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으며, 직접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간우회를 조직하고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자 박자혜는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그녀는 신채호를 만나면서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 살아야 했다. 전통적인 여성들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박자혜의 역할은 가정살림, 독립운동의 후방 지원 등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가족으로서 일경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폭력을 겪어야 했다. 


경제적인 궁핍함으로 국내로 들어온 박자혜는 자녀들을 전부 책임져야 했다. 산파 자격증으로 산파업을 개업해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당시 대부분 여성들은 출산을 산파에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다. 풀장사, 참외장사 등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산파업, 노점상을 하면서 자녀교육, 중국에 있는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국내 지사들과의 연락, 해외에서 밀입국하여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 지원 등이었다. 신채호가 옥중에 수감되어 있을 때는 옥바라지를 위해 책, 옷 등을 구입해서 보내주었다. 7년간의 옥중 생활에서 씌여진 원고들은 박자혜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못 보내주는 책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후방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신채호의 독립운동도 가능했던 것이다. 신채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한 후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1942년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는 1943년 10월 16일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여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