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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이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 中

3월 1일, 동시다발로 일어난 만세시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참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한국 대표를 급파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이 급사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종교계와 학생들이 독립운동 준비에 나섰다. 때마침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서울은 3‧1운동을 잉태한 곳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을 아울러 민족대표를 꾸렸고 경향각지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독립시위를 준비했다.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되었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했다. 반면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그 소식을 알렸다. 곧 헌병과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수천 명이 운집한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서울 시내는 만세소리로 가득 찼다.

민중의 역사, 3‧1운동 사진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시위 @독립기념관 제공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시위 @독립기념관 제공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시위 @독립기념관 제공

3월 1일에 서울에서만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평양․진남포․안주(평남), 선천․의주(평북)․ 원산(함남) 등 6개 도시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였다. 평양에서는 오후 1시에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나와 연합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진남포에서는 오후 2시에 감리교와 감리교계 학교 교사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인과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안주에서 오후 5시에 일어난 만세시위는 기독교 청년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선천에서는 장로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정오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거리로 나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천도교인들도 가담했다. 의주에서는 오후 2시 30분에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천도교인이 연대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원산에서는 오후 2시에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연대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했다. 이처럼 서울을 포함해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들은 연대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7군데 모두 철도역을 갖춘 도시로서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날 혹은 당일 날 전달받아 낭독했다.

3.1운동 당시 광경@국가기록원 제공 3.1운동 당시 광경@국가기록원 제공

전국에서 매일같이 시위가 일어나다


3월 1일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다음날부터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3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간 전국에서 일어난 276회의 만세시위 중 70%를 웃도는 197회가 북부지방에서 일어났다. 3월 중순을 넘어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중남부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다. 3월 하순에 다시 북부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만세시위의 절정기를 이뤘다. 매일 50~60여회에 이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만세시위의 양상은 도시와 농촌이 달랐다. 3‧1운동은 도시에서 시작되어 농촌으로 번져갔다. 도시에서는 종교인과 학생들이 만세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학생들은 시위를 모의하고 주도했으며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동참했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는 철시투쟁을 벌였다.


농촌 시위는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번화한 거리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고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옛날부터 농민항쟁에 자주 등장한 횃불시위, 봉화시위도 일어났다. 이처럼 3‧1운동은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위를 주도했고 동참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누구든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고자 했던 자발성은 폭발적이었다. 유림, 식민통치에 협조하던 면장․구장과 같은 관리는 물론 청소년들까지 누구든 조직하고 참여하는 자발성, 그것이 3‧1운동이 전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게 만든 힘이었다.

전국으로 확산된 3·1운동

  •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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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기미독립만세운동)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목전에 두고 지식인들은 세계정세를 예의주시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는 여운형이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촉구하고자 국내에 밀사를 파견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이 급사했다.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유학생들은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알리고자 송계백을 국내에 밀파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릴 호기라고 판단한 종교계와 학생들이 본격적인 독립운동 모의에 나섰다. 그 결과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천도교에서‘일원화’라고 표현했던 연대의 가치에 기반해 준비된 것이었다.
      1910년대에 지식인에게는 정치결사의 자유가 없었다. 종교계 지도자나 학교 교원 정도가 사회활동으로서 허용된 범주였다. 바로 그들이 독립운동 모의의 주체로 활약했다. 제일 먼저 천도교가 연대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제안했다. 천도교 창건자인 손병희와 그의 측근인 권동진과 오세창, 1910년 국망 직후 천도교에 입교해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던 최린이 주모자였다. 그들은 1919년 1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법으로는 세 가지를 마련했다. 첫째, 조선민족대표의 이름으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여 민중시위를 일으켜 조선민족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보여준다. 둘째, 일본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에게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한다. 셋째,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독립에 힘써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다. 연대를 위한 연락 실무는 최린이 맡았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원칙으로 대중화, 비폭력과 함께 일원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2월 초에 최린은 먼저 학교 교원들과 연대했다.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의를 받아냈다. 다음으로는 명망가인 박영효, 윤치호, 윤용구, 한규설 등 조선・대한제국 고위관료 출신과의 연대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가장 중요한 연대세력은 역시 기독교계였다. 최린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로 한 최남선을 통해 장로교 장로인 이승훈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승훈은 곧바로 2월 11일에 상경했고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는 동참할 뜻을 밝혔다.
      중앙집권적 단일조직인 천도교와 달리 기독교계는 장로교와 감리교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는 먼저 평북 선천에서 장로교 지도자인 양전백‧유여대‧김병조‧이명룡 등을 만나 동의를 받아냈다. 평남 평양에서는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와 함께 감리교의 신홍식 목사를 만나 동참의 뜻을 얻어냈다. 2월 17일 서울에 다시 상경한 이승훈은 최린이 아닌 송진우와 최남선만을 상대하게 되자 천도교의 독립운동 준비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로부터 감리교 세력이 강한 서울의 기독교계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승훈은 2월 20일에 감리교 지도자인 오화영・정춘수・신홍식・오기선 등과 만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대에 기반한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으로서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장로교의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상근, 현순 등도 만나 이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마침내 2월 21일에 가서야 최남선의 주선으로 이승훈과 최린이 만났다. 최린은 이승훈에게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준비를 중단하고 천도교와 연대하자고 설득했다. 이승훈은 최린에 오늘날로 환산하면 2억 5천만 원 정도 되는 5천원의 운동자금을 요청했고, 천도교에서는 이를 곧바로 제공했다. 그날 밤 이승훈은 함태영‧안세환‧김세환‧김필수‧오상근 등 장로교 지도자와 박희도‧오화영‧신홍식‧오기선 등 감리교 지도자들을 함께 만났다. 이 모임은 철야회의 끝에 천도교의 독립운동 방법을 확인한 후에 연대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승훈과 함태영을 교섭 대표로 선정했다. 다만, 독립청원 계획도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다음날 최린은 이승훈과 함태영을 만난 자리에서 독립청원 방식을 거부하며 독립선언을 하지 않을 바에는 연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승훈과 함태영은 다시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논의 끝에 천도교와 연대하기로 결의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가 성사된 것은 2월 24일이었다. 양측의 합의는 구체적이었다. 첫째, 독립선언은 3월 3일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수십만 명이 운집하게 될 서울에서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하기로 정했다. 둘째, 독립선언서를 대량 인쇄해 서울은 물론 각 지방에 배포하고 지방에서는 서울의 독립선언 일시와 독립선언서의 배포 방식 등을 따르도록 요청하기로 했다. 셋째,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가, 배부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함께 담당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대한 의견서 제출은 천도교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참석국 위원들에 대한 의견서 제출은 기독교가 담당하기로 했다. 넷째, 조선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선정하되,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와도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최린은 그날 밤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만나 연대를 요청했다. 1월 말부터 최린에게 독립의사를 비췄던 한용운은 즉시 승낙했다. 한용운의 주선으로 해인사 승려인 백용성의 동의도 받았다. 한편 최린은 한용운을 통해 유림과의 연대를 시도했던 것을 보인다. 곽종석과 김창숙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하나, 중심이나 조직이 뚜렷하지 않아 자칫 개별 접촉을 시도하다 보면 사전에 발각될 염려가 있고 시일도 촉급해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의 연대가 이루질 무렵, 학생 지도자들도 종교계의 독립운동에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본래 학생들은 전문학교 대표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들은 1919년 벽두부터 의기투합했다. 1월 6일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이 독립운동 문제를 논의하고자 모였다. 이 자리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와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익이 함께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준비는 종교계와 마찬가지로 1월 하순부터 이루어졌다. 준비과정에서 주익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는데, ‘일본과 제휴하고 동양의 평화에 대한 유색인종 단결의 결실을 맺고자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다’를 취지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한 달여간의 준비 끝에 2월 20일에는 각 전문학교 대표를 뽑고 대표자들이 체포될 경우에 대비해 시위를 이끌어갈 책임자를 정했다. 그런데 2월 23일에 박희도가 종교계가 연대해 독립시위를 벌일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2월 25일에는 독립시위 날짜가 3월 1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 지도자들은 이틀간 잇달아 회의를 열어 3월 1일에는 전문학교는 물론 중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3월 5일에는 학생만의 독자적인 시위를 전개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이처럼 학생들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3월 1일의 독립선언식 참여를 결정함으로써 종교계의 독립운동에 연대하고자 했다.
      2월 27일과 2월 28일에는 민족대표 선정,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등 구체적인 진행과 관련한 연대 활동이 펼쳐졌다. 2월 27일에 종교계는 민족대표를 최종 선정했다. 천도교는 중앙교단 차원에서 도사, 장로를 중심으로 최고위직 간부 15명이 참여했다. 기독교에서는 장로교에서 6명, 감리교에서 10명이 참여했다. 불교에서는 앞서 언급한 2명이 참가했다. 그날로 민족대표들은 최린에게 도장을 보내 독립선언서에 날인했다. 독립선언서도 2월 27일에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공장 감독인 김홍규는 그날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를 인쇄했다.
      2월 28일의 독립선언서의 배포 역시 종교계와 학생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천도교월보사 사장인 이종일의 책임 아래 독립선언서가 전국에 배포되었다. 먼저, 천도교는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배포에 나섰다. 안상덕은 2천매를 들고 강원도와 함경도로 향했다. 김상열은 3천매를 가지고 평안도로 출발했다. 이경섭은 1천매를 받아 황해도 지역으로 향했다. 한편, 인종익은 2천매를 받아 남부지방인 전라북도와 충청북도로 떠났다. 기독교계 인사 중에는 이갑성과 함태영이 배포를 주도했다. 이갑성은 강기덕에게 1천 5백매를 보내 학생들이 서울에 배포하도록 요청했다. 2월 28일 밤 승동교회에는 10여명의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나눠가졌다. 또한 이갑성은 이용상에게 3백~4백매를 주어 경상도에 배포하도록 했다. 김병수에게는 1백매쯤을 주면서 군산지방에 배포하도록 했다. 함태영은 6백매 정도를 평양에 보내고 나머지 6백매를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 김창준에게 주었다. 김창준은 이 중 3백매를 이계창을 통해 선천에 보냈고 오화영을 통해서는 개성에 1백매, 원산에 1백매를 보냈다. 불교계에서는 한용운이 3천매를 받아 중앙학림 학생 오택언, 정병헌 등 9명을 통해 서울에 배포하도록 했다. 이처럼 서울에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은 모두 학생들에게 맡겨졌다.
      그날 밤, 처음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 즉 민족대표 중 23명이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그동안 학생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함께 했던 박희도와 이갑성이 다음날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민족대표들은 자칫하면 불행한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며 학생과의 연대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결국 민족대표들이 참가하는 독립선언식 장소는 탑골공원이 아닌 인사동에 자리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이처럼 종교계의 연대는 민족대표 선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종교계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학생들은 종교계가 준비한 독립선언에 연대하고자 했다. 민족대표들은 학생들의 연대를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서 배포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지도자를 매개로 한 종교계와 학생 간의 연대는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월 1일 새벽 학생들이 뿌린 독립선언서가 시내에서 발견되었다. 오전에는 덕수궁에서 고종 장례 절차의 하나인 조문을 낭독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시내에는 전국에서 고종 장례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 교문을 나온 학생들은 탑골공원으로 행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민족대표 33명 중 29인은 태화관에 집결했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꺼내 돌렸으나, 낭독하지는 않았다. 한용운이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연설을 한 다음 식사를 하고 다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태화관 주인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독립축하연을 베풀고 있음을 알리도록 했다. 오후 5시 반경 헌병과 경찰 80여명이 태화관에 나타나 29인을 체포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가졌던 시각인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집결해 있었다. 시간이 되어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 대표인 강기덕 등은 태화관으로 찾아와 민족대표들에게 함께 탑골공원에 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이 폭동하지 않을까 우려하며 이를 거절했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3천~4천여 명의 시위대가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중에 독립선언서를 갖고 있던 해주 출신의 기독교 지도자인 “아래 위에 수염이 있는 머리를 깎은 마른 흰 얼굴의 30 몇 세의 백색 한복을 입은”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시위대는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독립만세를 부르며 탑골공원을 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탑골공원을 나온 시위대는 동대문과 종로 방향으로 나눠 행진했다. 시위대 본류는 남대문역 앞까지 갔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서소문을 향했다. 이 중 일부는 프랑스공사관으로 행진했다. 이 때 경성전수학교 학생 박승영은 공사관에 들어가 ‘조선은 오늘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독립국이 되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프랑스 정부에 알려달라고’요청했다. 시위대 본류는 다시 서소문 언덕을 넘어서 태평로를 거쳐 대한문 앞에 집결했다. 그곳에서 처음부터 종로에서 곧바로 대한문 앞으로 향한 일부 시위대와 합류했다.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 일단 집결한 시위대는 다시 갈래를 나눠 행진을 벌였다. 첫 번째 무리는 광화문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 경복궁을 향해 행진했다. 두 번째 무리는 덕수궁을 끼고 왼쪽에 있는 영성문을 지나 미국영사관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른 후 서대문으로 빠져나가 옛 도성을 끼고 행진했다. 세 번째 무리는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고종 유해가 모셔져 있는 빈전에 들어가 곡을 하겠다고 우기며 헌병, 경찰과 옥신각신했다. 시위군중 중 일부는 혼란을 틈타 슬쩍 빈전에 들어가 조문을 마쳤다. 네 번째 무리는 남산 기슭에 자리한 조선총독부를 향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한편, 탑골공원을 나와 동대문을 향해 행진하던 시위대는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방향을 틀어 순종이 거처하는 창덕궁을 향했다. 그 앞에서 만세를 부른 시위군중은 오른쪽 방향에 자리한 조선총독부의원을 향해 행진했다.
      서울 시내에 일어난 시위는 저녁이 되자 교외로 확산되었다. 저녁 8시경 마포에 있는 전차 종점 부근에서는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집결하면서 2백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오후 11시 경에는 신촌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2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 3개 중대와 기마병 1개 소대를 시위 해산에 동원했다. 이날 시위는 1만여 명이 참여한 평화적 만세행진임에도 불구하고 29명의 민족대표를 포함해 174명이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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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전광장 3‧1운동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자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부각시키기 위해 천도교, 개신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 민족적 독립 의사 표명을 위한 3‧1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때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학생단 주도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독자적인 운동을 추진하던 서울의 연희‧보성법률‧경성의학 등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민족 대표 측의 일원화 요청을 수용하였다. 이에 3월 1일의 독립 만세 시위운동에는 민족 대표와 행동을 함께 하고, 3월 5일에 학생단이 제2의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앞에는 귀향하는 지방 인사들과 시민 학생 수만 명이 모였다. 연희전문학교 김원벽(金元璧)과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康基德)이 각기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흔들며 군중을 이끌고 남대문 방면으로 향했다. 군중 속에서 「조선독립신문」이 뿌려졌다. 시위대가 남대문 부근까지 진출하자 경찰대가 강력히 저지하여 지휘자인 김원벽과 강기덕 등이 붙잡혀 갔다. 그러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였다. 남대문시장으로부터 조선은행 앞을 지나 보신각 부근에 이르러 경찰대의 야만적 저지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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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산 3‧1운동

      송산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6일에 사강리에서 홍면(洪면)의 지휘 아래 약 1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부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전개과정은 매우 평화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틀 뒤 장날인 3월 28일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는데, 이 때 시위 군중은 헌병과 충돌하였다. 헌병은 홍면 외 2, 3명을 주재소로 끌고 가려고 시위 군중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홍면을 향하여 권총을 쏘았다. 홍면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자 이 광경을 본 군중은 일시에 격노하여 헌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위급함을 느낀 헌병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로 달아났으나 흥분한 군중이 돌과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가 결국 순사부장 노구치(野口)를 죽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 같은 송산면민들의 완강한 항거에 부딫힌 일본 헌병과 경찰은 4월 12일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송산면에는 헌병 5명, 군인 7명을 선두로 무장한 순사 및 순사보 수 명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체포, 구금하고 민가에 방화하기 시작하였다. 사강리를 비롯하여 봉가(鳳歌)‧삼존(三尊)‧육일(六一)‧마산(馬山)‧중송(中松) 등 6개 마을, 총 525호 중에서 200호를 소각하였다. 그 중 사강리에서는 131호 중 82호가 불타고 봉가리에서는 57호 중 47호가 불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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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진 3‧1운동

      최초 시위는 3월 14일 하가면 화대동에서 일어났다. 누가 주동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날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은 집집마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오전 11시에 5000여 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이 헌병분견소 앞에 이르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5명이 즉사했다.
      이 소식에 격분한 하가면민 1000여 명이 이튿날인 15일에 화대시장에 모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시위 군중이 면장을 구타하고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자 헌병이 총격을 가해 4명 이 즉사했다. 이 날 시위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풍신(董豊信)은 곧바로 시위 현장으로 달려 나와 만세 시위를 이끌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1921년에 17살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 16일에는 아간면 시장에서 400여 명이 시위를 벌이자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키고 시장을 폐쇄했다. 3월 17일에는 상고면 보촌동에서 보촌학교 학생과 중평동민이 시위를 일으켰다. 3월 18일에는 우시장에서 7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헌병의 발포로 2명이 즉사했다. 3월 22일에는 운만대 선지곡에서 4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 수원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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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3‧1운동

      수원시 내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때의 운동 양상은 전반적으로 격렬한 편이었다.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은 장안면민과 우정면민들이 연합해 전개한 4월 3일의 만세운동이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차희식(車喜植)‧차병혁(車炳爀) 등이 계획해 장안면 덕정리 뒷산에서 횃불 시위로 시작되었다.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석포리 조암(朝巖)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후, 장안면사무소의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며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그들은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다시 우정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은 우정면사무소에서 서류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방화했고 오후 5시경,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공포탄을 발사하며 저지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양측에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날의 만세운동으로 차희석‧이영쇠 등 27명의 시위군중이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일본군경에 의한 끔찍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군 중위 아리다(有田後夫)가 인솔한 20여 명의 일본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 4월 5일 발안(發安)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서 일본인 경찰부장이 죽은 사건에 대한 보복 응징을 하였다. 그들은 민간인에게 알릴 것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인‧천도교인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교회의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집중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한 부인이 안고 있던 어린 아기를 창밖으로 내놓으며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이마저 찔러 죽였다.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 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를 방화했는데, 아직 살아 있던 사람들은 불길 속에서 죽어갔다. 이 만행으로 28명이 죽었다. 그밖에도 일본군경은 교회 건물과 민가 등 31호를 방화하였다. 이런 만행은 외국 선교사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양심 있는 일부 일본인까지도 격분하게 하였다. 영국인 선교사 스코필드(Schofield, F. W.)는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다.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 등은 목격자의 증언과 학살사건을 게재해 소상히 보도하였다. 또한, 일본기독교회동맹에서도 대표를 현장에 파견,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일본인 영문학자 사이토(齋藤勇)는 현장을 답사한 뒤 「어떤 살육사건」이라는 장편 시를 발표해 지성인의 통분을 읊었다. 이 밖에도 수원시 내에서는 3월 26∼28일에 송산면 일대에서, 29일 성호면 오산(烏山)에서 각각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한편, 3월 29일에는 수원기생조합의 김향화(金香花)가 자혜병원(慈惠病院)으로 가던 중 여러 기생을 주도,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 수원군 장안면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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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군 장안면 3‧1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 대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장안면 수촌리 천도교 순회 전도사 백낙열(白樂烈)과 팔탄면의 김성열(金聖烈) 등은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와 인근 지역 만세시위를 추진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말 또는 4월 1일을 전후하여 장안‧우정면 지역에서는 산상 횃불 시위가 퍼지고 있었으며, 수원‧안성 일대에서 강력한 만세 시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10년대 무단통치를 펴던 일제는 면의 기능을 강화하여 대부분의 면장을 친일적 인사로 교체하여 지방행정을 재편, 장악하였다. 이에 대해 구장(區長)[현재의 이장(里長)]들은 주민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장안면은 그 대표적인 곳으로, 4월 3일 아침 장안면 각 마을 구장들은 마을 사환을 시켜 집집마다 연락하여 전 주민을 동원하였다. 오전 10시 반경 200명이 장안면 사무소에 모여 면장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게 한 후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우정면과 경계에 있는 쌍봉산으로 갔다. 쌍봉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우정면 주민들과 합세하여 군중은 2,000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우정면사무소를 부수고 다시 대열을 지어 화수리로 나아가 주재소를 불태웠으며, 총기를 발포하여 인명을 살상한 가와바다[川端豊太郎] 순사를 추격하여 처단했다. 4월 4일 새벽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有田, 제암리 학살의 주역]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의 방화 총격을 시작으로 수 차에 걸쳐 무단 발포와 야간 수색이 자행되었다. 주택 276채를 방화하고, 수천 명의 주민들에게 고문을 가하였으며, 그 중 34명을 기소하여 최고 징역 10년 형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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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 3‧1운동

      안성군의 3‧1운동은 3월 11일 안성읍을 시작으로 죽산‧양성‧원곡면 일대에서 연이어서 격렬히 전개되었다.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0일 윤순철(尹順哲)‧고성준(高成俊)‧한국초(韓國初) 등이 주동이 되어 태극기 70장을 만들어 이 날 오후 장터에서 2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튿날 오후에는 주동섭(朱東燮)‧한삼석(韓三石)‧권업동(權業同) 등이 주도하여 주민들과 함께 동산에 올라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성군내의 가장 크고 격렬한 만세운동은 양성면과 원곡면의 합동시위였다. 처음에는 각각 별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나, 성면에서 합류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이 1, 000여 명의 원곡면민들을 주동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을 선두에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은 양성면에 있는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귀가하던 1,000여 명의 양성면민과 합류,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경찰관주재소와 숙직실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경찰에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끌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기물을 파괴, 방화한 뒤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또한, 인근 주재소와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또, 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귀향한 원곡면민들은 다시 원곡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 때 잡혀 옥고를 치른 사람만도 126명이나 되었다. 한편 이죽면에서는 이기훈(李起薰)‧윤상구(尹商求)‧이응식(李應植)‧최창달(崔昌達) 등이 주도하여 4월 1일 도로개수 부역에 나온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 일죽면에서는 4월 2일 오순경(吳順景)‧조성행(趙聖行) 등이 200여 명의 주민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 안성군 이죽면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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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 이죽면 3‧1운동

      안성군 이죽면은 구 죽산군 시절 군소재지였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 이죽면이 되었다. 안성군의 3‧1운동은 매우 치열했다. 1919년 3월 11일 안성 읍내에서 50명의 시위가 있었다. 그 후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지다가 3월 30일 5~600명의 시위, 3월 31일 3,000명의 시위가 다시 안성 읍내에서 벌어졌다. 4월 1일에는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일어나 양성주재소와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우편소, 양성면사무소, 일본인 상점들을 파괴하였다. 이 원곡과 양성의 만세시위는 일제가 민족 대표 재판에서 언급했던 평북 의주군 옥상면 시위, 황해도 수안군 시위와 함께 전국 3대 의거 중 하나이다. 4월 1일 이죽면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명은 교정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두현리민 등 수백 명과 함께 죽산경찰서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몰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때 두현리 이기훈(李起薰)과 이응식(李應植), 장재리의 최창달(崔昌達)은 두현리에서 도로 보수 부역을 하던 인부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하며 죽산 시위에 참여하게 하였다. 4월 2일 죽산시장에서 이죽면 장원리‧장계리‧죽산리‧매산리 등지 주민 2,000명이 야간에 모여 죽산경찰관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은 이날도 태극기를 받들고 죽산시장 시위에 참여하였다.

    • 시흥군 수암면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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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흥군 수암면 3‧1운동

      서울의 3‧1운동은 시흥군에도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 7일 시흥군 영등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3월 하순에는 외곽 농촌 지역 농민들에게로 파급되었다. 북면(3월 23일), 신동면(3월 25일), 서이면(3월 27일), 서면(3월 27~29일), 과천면(3월 29~30일), 군자면(3월 29일) 등지에서 자발적인 만세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에서는 18개 마을 이장들 앞으로 다음날 비석거리(碑立洞)로 모이라는 통문이 전달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윤병소(尹秉昭)는 동리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3월 30일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와리(瓦里) 홍순칠(洪淳七)은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며 하인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이리하여 3월 30일 동리민 약 2000여 명이 비석거리에 모여 향교, 면사무소, 보통학교를 돌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수암리의 이봉문(李奉文)은 이날 밤, 만세 시위에 소극적이었던 구장 집에 주민들을 이끌고 가서 항의하기도 했다.

  • 강원
    • 철원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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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 3‧1운동

      철원의 3‧1운동은 최병훈(崔炳勳)이 이웃 평강(平康) 천도교 대교구로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가져와 철원의 천도교인에게 전해준 것으로 계획이 시작되었다. 천도교인들은 곧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 11명 전원이 붙잡히면서 일단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뒤 기독교측에서 청년단원과 각 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3월 7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청년단측에서 서울의 정황을 살핀 뒤 전개하자고 주장하여 10일로 연기되었다. 3월 10일 박연서(朴淵瑞)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농업학교(鐵原農業學校)‧보통학교 학생들과 교회‧지방청년 등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추진되었다. 철원군청에서 합류한 뒤, 시위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나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헌병대로 몰려가 전날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오후 4시경 군청으로 몰려가 일본인 서무주임과 직원들을 위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고, 또 윤태항(尹泰恒) 집으로 도망친 군수를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날 운동이 끝난 뒤에도 200여 명의 청년들은 철원역으로 행진하여, 마침 정차하고 있던 열차 안의 승객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열차 안에 있던 조화벽(趙和璧)주 01)을 비롯한 승객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독립연설회를 개최하고,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을 찾아가 협박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3월 18일 이병준(李炳準)이 철원 장날을 이용하여, 수 백명의 천도교인을 주동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갈말면에서는 3월 12일 신성규(申聖奎)‧김칠룡(金七龍) 등이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여 청양주재소와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면장 황희수(黃熙秀)도 대열에 합류하여 새벽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에는 동막리처럼 먼 곳의 주민들도 삼베주머니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와 참여하기도 하였다. 내문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최재명(崔在明)‧재청(在淸) 형제 등 독검리 천도교인이 주도하여 4월 8일에 일어났다. 이때 모인 700여 명의 군중은 북창리의 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석교리 헌병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자 해산하였다.

  • 충청
    • 음성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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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 3‧1운동

      음성군 내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 읍내에서 서당생도 수 명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그 뒤 4월 11일까지 각 면에서 거의 한 차례 씩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음성군 내의 독립만세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4월 1일 김을경(金乙卿)‧이중곤(李重坤)‧권재학(權在學)‧추성렬(秋成烈)‧이교필(李敎弼) 등이 주도하여 전개한 소이면 한내장터의 만세운동이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진행된 독립만세시위운동은 소이면사무소에 쇄도하여, 면장 민병식(閔秉植)에게 독립만세를 선창케 함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김을경‧이중곤 등 9명이 구금되었다. 이에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달려가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창문을 파괴하는 등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 일본경찰은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12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음성읍에서는 3월 28일 오후 2시, 서당생도들을 주축으로 한 만세운동에 이어, 4월 6일 밤 9시 500여 명의 시위군중이 산 위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삼성면에서는 이성교(李聖敎)‧임백규(林白奎)‧유해길(柳海吉) 등이 주도하여 3월 20일 인근 산 위에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일에는 오후 8시경 600여 명의 면민이 각 동리별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천평리에 있는 면사무소에 모였다. 이들은 낫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현관과 유리창을 부수고,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새벽 2시경 해산하였다. 맹동면에서는 3월 20일 천도교인 김동환(金東煥)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봉화를 올리며 만세운동을 전개한 데 이어, 4월 2일 쌍정리에서, 3일 마산리(麻山里)‧쌍정리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감곡면에서는 4월 1일부터 4일까지 주촌리‧문촌리 주민 수백 명이 응봉산(應鳳山)과 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대소면‧금왕면 내송리에서는 4월 2일, 원남면에서는 4월 5일 보천장터에서, 11일 주봉리에서 각각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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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 3‧1운동

      천안시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1919년 4월 1일에 갈전면 아우내[並川]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이 운동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유관순(柳寬順)이 끼어 있어, 세칭 ‘유관순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만세운동은 용두리 지렁이골 유중권(柳重權)의 딸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재학 중, 3월 5일의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내려와, 동네 어른인 조인원(趙仁元)‧유중권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등에게 보이고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갈전면에서는 조인원을 중심으로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던 중, 인근 수신면과 성남면에서도 김상훈(金相勳)‧홍일선(洪鎰善) 등의 20대 청년들이 밤마다 각 마을 근처의 산에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알고, 두 계통의 주동자가 만나 만세운동을 합동으로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4월 1일 1시경, 조인원이 3,0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헌병파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일본헌병들이 기관총을 난사해, 유중권 등 많은 사상자가 났고, 시위군중은 일단 후퇴하였다. 그러나 격분을 참지 못한 시위군중은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가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취하려 하였다. 이에 조인원의 만류와 설득으로 충돌 없이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천안에서 급파된 일본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주동자 가운데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끝까지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다가 마침내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밖에도 입장(笠場)장터에서는 3월 20일과 28일 2번에 걸쳐 미국인이 경영하는 양대여숙(良垈女塾)의 여학생과 직산금광(稷山金鑛) 광부들이 주도해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9일 천안읍에서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해 26명이 검거되었다. 또 3월 14일 목천보통학교(木川普通學校) 학생 120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헌병과 충돌, 4명이 검거되었다. 3월 31일에는 성환면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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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 3‧1운동

      3‧1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금산 지역은 충청남도가 아닌 전라북도에 속한 지역이었다. 전라도의 3‧1운동은 남도와 북도로 나뉘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북도의 3‧1운동은 전라남도보다 먼저 일어났을 뿐 아니라 훨씬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전라남도는 전라북도보다는 늦게 일어났던 반면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남북도에서는 3월 상순에서 4월 상순경까지 약 40일 동안 수많은 학생과 청년, 민중이 힘을 모아 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금산면에 거주하고 있던 김용술(金用述)과 임승환(任勝煥)은 여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3‧1운동과 연계하여 금산군에서도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3월 22일 상옥리(上玉里)에 위치한 김용술의 집에서 각 면의 대표 20여 명이 모여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격문을 작성하였다. 금산읍 장날이었던 3월 23일 아침, 구호열(具浩烈)과 변희조(卞熺朝) 등은 시장으로 몰려드는 정필종(鄭必鍾)‧김태석(金泰碩)‧김일찬(金日賛) 및 장꾼들에게 전날 인쇄한 ‘금산 경고’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격문에 표시된 시간인 오후 2시경에는 김용술과 임승환이 20여 명의 청년과 함께 지정된 장소인 우시장 상부에 나타나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주변 사람들을 선동했다. 이 소리에 주위에 있던 수천 명의 군중이 호응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금산읍 헌병 분대가 긴급히 출동하였고, 김용술을 비롯한 몇몇 청년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헌병들은 공포를 쏘며 몽둥이를 뒤흔드는 등 군중들을 짓밟았으나 주민들은 쉽게 해산되지 않았다. 일제는 주모자인 전위부대에 잉크를 뿌려 표식을 할 계획까지 하였으며, 임승환도 체포하였다. 이날의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수천 명이었다는 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날 밤 10시경 금산 읍내에 위치한 남산 밑에서 김일남(金一南) 등 30여 명이 선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읍내를 향해 행진하였다. 주민들도 뛰어나와 동참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제지되었다. 3월 25일에는 금산읍의 동쪽에 위치한 제원면(濟原面) 제원리(濟原里)에서 만세 시위가 또 다시 전개되었다. 제원리에 살고 있던 청년 박영규(朴瑛圭)는 미리부터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고 있던 중, 23일 전개된 금산읍 장터의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결심을 확고하게 굳혔다. 그리하여 25일 저녁에 본인의 집에서 한지에 태극을 그려 넣고 양쪽에 한자와 국문으로 ‘한국 독립 만만세’라는 글귀를 쓴 태극기와 유사한 깃발을 만들어 수숫대에 매달았다.
      그리고 동네 중앙에 매달아 놓은 종과 북을 떼 내어 두드리면서 주민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함께 만세를 부르며 마을을 돌고 또 돌기를 반복했다. 다음날인 26일 오후 4시경에 박영규는 또다시 도로 부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여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날 밤에도 박영규는 몇몇의 청년들과 함께 마을 앞길을 행진하며 운동을 계속하였다. 금산 헌병 분대에서 제지하였으나 그는 굽히지 않고 외려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3월 28일(음 2월 27일) 금산읍 장에는 23일에 있었던 만세 운동을 한 차례 겪은 헌병들이 이른 아침부터 경계를 했다. 더욱이 이날은 군수 및 친일 인사들까지 동원되어 주민들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오후 6시쯤 상점들은 하나 둘 문을 닫고, 노점과 행상인들도 짐을 싸기 시작하자 일제도 안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려는 것 처럼 서성대던 수백 명의 군중들이 갑자기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 정연하게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모여 서 있던 민중들도 따라 나서기 시작하면서 인원은 점점 증가하였다. 선언서와 격려문도 배포되었다. 당황한 헌병대는 공포를 발사하며 군중들의 해산을 요구했지만 시위 대열은 무너지지 않고 시가지를 행진했다. 너무도 질서정연한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일본 헌병대도 감히 제지하지 못하였다. 밤 10시경에는 다시 서대산(西臺山)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읍내를 비롯하여 금산군내의 각 마을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워낙 늦은 밤이기도 했고 금산군의 각 마을마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헌병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금산면의 김현재(金現在), 한철종(韓喆宗), 김봉준(金奉俊), 정해준(鄭海駿) 등 20여 명을 구속하였다.
      3월 31일에는 또다시 복수면(福壽面) 곡남리(谷南里)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곡남리에 거주하고 있던 김영호(金永浩)와 정재철(鄭在轍), 오연구(吳然九) 등이 곡남리 앞길에서 오후 2시경 인근 주민들과 함께 도로를 수리하면서 각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 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들은 곧바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앞장섰고, 함께 도로 수리 공사를 하고 있던 수영리(壽永里)의 주민 약 2백 명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만세를 불렀다. 곡남리에 살고 있던 유영준(兪英濬) 등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마침 이때 도로 공사를 감독하러 나왔던 헌병들이 이들을 제지하려고 나섰지만, 김영호와 오연구 등은 이를 묵살하고 계속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의 대열을 지휘하면서 만세 행렬은 더욱 커졌다. 곧이어 진산면(珍山面) 헌병 주재소에서 응원대가 급하게 파견되어 일시적으로 만세 시위가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김영호 등은 문서를 만들어 백암리(白岩里) 구장 등에게 전달하였고, 뿐만 아니라 낮에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해야 한다며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그날 밤 11시경에 2백여 명이 다시 소리 높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형성하여 진산면(珍山面) 읍내로 향하며 행진하였다. 이에 진산 헌병주재소 헌병들의 출동으로 군중은 해산되었고 김영호와 정재철 등 7명이 구속당하였다. 금산의 3‧1운동은 이후에도 늦은 밤을 이용하여 산 위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산 위에서의 횃불 만세 시위로 하홍학(河洪學)은 피살되었고, 한철종(韓喆宗), 김현재(金現在)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 경상
    • 대구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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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3‧1운동

      서울에서 3‧1운동의 거사 준비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을 때, 대구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李萬集)‧이상백(李相佰)‧백남채(白南埰) 등은 경상도의 연락 책임을 맡은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들었다. 그 뒤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같은 교회의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3월 8일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계성학교(啓聖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과 연도의 주민‧기독교인‧천도교인 등이 가세하여 군중의 수는 1,000여 명이 되었다. 만세시위 대열이 경찰서를 지나 달성 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 5, 6대로 무장된 일본 헌병 및 경찰에 의해 시위대는 저지되었다. 157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거사 뒤 대구의 학생들과 주민의 항일 저항 의식은 날로 높아져 재의거를 위한 협의가 계속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대구고등보통학교‧계성학교‧신명학교 등에 3월 10일부터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삼엄한 경계를 펼치자 학생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만세운동을 계속하여 다른 지방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그 밖에 3월 30일 동화사(桐華寺) 부속의 지방학림(地方學林) 학생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은 대구 남문외 장터에서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5일 대구 대명동 공동묘지에서 최경삼(崔敬三)의 딸 제례에 모였던 5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사천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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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 3‧1운동

      1919년 3월 18일의 진주의거에 참여하였던 황순주(黃順柱)‧박기현(朴基玄)‧김종철(金鍾喆) 등 3명은 강달영(姜達永)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얻어 와, 3월 21일의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이 끝나는 시간에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윤조(李允祚)가 졸업식 전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만세시위는 예정보다 앞당겨 전개되었다. 이 때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인물 3명이 구금되었으나, 그 뒤 4월 14일 중선포(中宣浦)의 도로공사 노역을 마치고 귀가하던 사천면 두량리의 유승갑(柳承甲)과 손계묵(孫季默) 등이 도로공사 인부 100여 명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인부들이 일제히 호응, 만세시위대는 사천읍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급거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많은 사람이 검거되고 부상 당하였다. 한 편, 삼천포에서는 3월 25일 박종실(朴琮實)과 김우열(金瑀烈) 등의 주도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주동인물은 붙잡히고 시위대열은 해산되었다. 이 때 한국인 형사 강일선(姜日善)은 구속된 주동인물들에게 온갖 학대와 횡포를 다하였으며,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26일 다시 봉기하였다. 그 밖에 곤양면 송전리에서는 3월 13일, 4월 6일, 4월 19일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서포면 구평리에서도 4월 10일, 4월 16일 송찬홍(宋贊洪)과 이주효(李柱孝)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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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3‧1운동

      안동에서는 이상동(李相東)의 단독 시위가 기폭제 역할을 하여 1919년 3월 17일 예안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전개된 뒤, 3월 말까지 계속해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처음 계획은 일본유학생 강대극(姜大極) 등이 3월 12일의 예안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으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 등은 다음 장날인 17일에 전개하기로 재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 등사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주동자들은 수천 명의 장꾼들을 동원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은 오후 6시경 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으로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안동수비대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25명이 잡히고 해산하였다. 22일에 이루어진 2차 만세운동에서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한 일본군과 투석전을 벌여 13명이 부상 당했다. 군내의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은 안동읍에서 전개되었다. 3월 18일 기독교인‧천도교인 등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군청‧경찰서‧지방법원 안동지청을 파괴, 방화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제지하던 일본군의 사격으로 말미암아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의 만행에 격분한 기독교인‧천도교인‧농민 등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23일 다시 관공서를 포위하고 투석하였다. 이때도 일본군의 야만적 발포로 14명이 현장에서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였다. 길안면에서는 손영학(孫永學)‧김정익(金正翼)‧김정연(金正演)‧장두희(張斗熙) 등이 3월 21일의 천지(泉旨)장날을 이용해 5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주동해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습격 파괴하였다. 이 곳에서도 실탄 사격을 감행하는 일본경찰과의 사이에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임동면에서는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 등에 의해 3월 21일 편항(鞭巷)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분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해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그 안에 비치된 권총 등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버리고 새벽 3시까지 만세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안동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57명이 잡혀 옥고를 치렀다. 임하면에서는 임찬일(林燦逸)‧손돌이(孫乭伊) 등이 3월 21일 오후 9시경, 5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경찰의 발포로 3명이 현장에서 죽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운동으로 변하였다. 임북면에서는 권태환(權泰煥) 등의 주동으로 3월 22일, 일직면에서는 이구덕(李九德)의 주동으로 3월 21일, 동후면에서는 23일, 도산면 토계동에서는 3월 18일, 풍산면에서는 3월 24일, 풍남면에서는 3월 27일에 각각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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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 3‧1운동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의거로 시작된 의성군의 독립만세운동은 안평‧봉양‧점곡‧신평‧가음‧춘산면 등지로 확산되면서 4월 초까지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비안공립보통학교 의거는 3월 3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갔던 김원휘(金原輝)가 마침 그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비안면 쌍계동 장로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에게 그 곳 상황을 전하고 의거를 종용하면서 비롯되었다. 한편, 같은 달 10일 대구의거를 목격하고 돌아온 박우완(朴又完)과 대구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박상동(朴尙東) 등이 여기에 가담함으로써 학생과 안평동지역 기독교인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우희원(禹熙元)‧박기근(朴基根)‧박만녕(朴萬寧)‧정인성(鄭寅城) 등은 3월 11일 비안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미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거사계획은 12일로 변경되었다. 3월 12일, 전날 사건으로 시위를 계획한 학생들이 교장실에 불려가 설교를 듣고 있는 동안, 전교생 150명은 뒷산으로 올라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설교를 듣고 있던 4명의 학생도 뛰쳐나와 같이 만세를 불렀다. 이후 출동한 일본경찰과 교사들에 의해 학생들은 강제 해산되고 계획한 학생은 검거되었다. 강제 해산된 일부학생들은 이날 오후 1시경, 비안면 쌍계동으로 가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보통학교 학생의거의 영향으로 3월 13일과 16일에 비안면 동부동에서 김석근(金石根)‧임재호(林在虎) 등의 주동으로 1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소식은 안평면 대사동 교회에도 전달되어,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 등의 주도로 3월 15‧17‧18‧19일까지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한편, 봉양면 도리원에서는 이양준(李良俊)이 3월 19일 도리원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대사동의 해산 군중이 합세하게 되면서 군중의 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군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인하여 3명이 현장에서 죽고, 6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구금되었다. 그 밖에 점곡면에서는 16‧18‧19‧20일에 걸쳐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의성읍에서는 3월 18일, 신평면 덕봉동에서는 25일에 각각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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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 3‧1운동

      청도의 3,1독립만세운동은 운문면 신원동에 사는 청년 유지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가 고종의 인산(因山) 참배 차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사립 문명학교(文明學校) 교장 김우곤(金禹坤)의 집에서 수 명의 청년들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격문 20여 장을 작성해 면내 방음‧대천‧오진‧공암리의 각처 요소에 붙였다. 이로 인해 3월 18일김진효(金鎭孝) 등 청년들이 운문주재소로 호출당해 취조를 받고 돌아오던 중, 당장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운문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4명에게 각각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쓰게 하고 그들은 ‘만세’를 써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만들어 독립만세시위운동에 들어갔다. 이에 수많은 군중이 호응해 열광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뒤 자진해산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로 인해 많은 사람이 구금되었다.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던 대성면의 김보곤(金寶坤)은 그 곳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곧바록 귀향하였다. 시위군중들은 3월 17일 유천(楡川)주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5월 17일 400여 명의 군중은 미즈노(水野) 외 2명의 일본인 집을 습격, 구타한 뒤 철수하였다. 이 밖에도 3월 11일 매전면 장연동에서 김집이(金集伊)를 비롯한 농민 7명, 3월 30일과 4월 20일 대성면 거연동에서 이승덕(李承德) 등 단산서당(丹山書堂) 학생들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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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3‧1운동

      서울에 있던 정현상(鄭鉉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상백면으로 내려와 정현하(鄭鉉夏)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이기복(李起馥)도 이원영(李愿永)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비밀리에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연표(鄭演彪)의 중개로 운동을 일원화해, 3월 18일 삼가(三嘉) 장날에 약 400명의 시위 군중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시위 군중은 강제 해산되고, 시위를 주도한 10명이 붙잡혔다. 3월 19일 합천읍 장날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심재기(沈載棋) 등 16명이 붙잡혔다. 3월 20일 다시 의거하여 시위행진을 벌였으나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4명이 순국, 11명이 부상하였고, 붙잡혀서 형을 산 자가 22명이었다. 한편 대병면에 사는 임상종(林尙鍾)은 서울에서 몰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권영두(權寧斗)‧권중박(權重璞)‧정시권(鄭時權)‧유인수(柳仁秀)‧권양희(權良熙)‧송헌기(宋憲基) 등과 협의, 창리(倉里)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3월 20일 4,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던 중, 출동한 일본 헌병이 총으로 맨앞에 있던 이병추(李秉樞)를 쏘았다. 이에 군중이 흥분하여 주재소와 대병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서류를 불태웠다. 이날 일본군의 발포‧제지로 54명이 검거되었다.
      3월 21일 초계리(草溪里) 장날에는 이원화(李源華)‧전하신(全夏善)‧성만영(成萬永)‧김덕명(金德明) 등이 주도하로 4,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역시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2명이 순국, 10명이 부상당하였고, 많은 사람이 붙잡혔다. 쌍백면에서는 3월 22일에 4,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벌였는데, 출동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공사겸(孔士謙)이 현장에서 죽고 많은 사람이 붙잡혔다. 묘산면에서는 3월 22‧23일에 걸쳐 윤병석(尹炳奭)‧윤병은(尹炳殷)‧윤병양(尹炳陽) 등이 주도하여 1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2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부상 또는 검거되었다. 그밖에 3월 23일 오후 3시경, 가회‧쌍백‧삼가면 등지에서 모인 1만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삼가읍 정금당(正衿堂) 앞 광장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날 연사로 나온 김전의(金典醫)‧정방철(鄭邦哲)‧김달희(金達熙)‧임종봉(林鍾鳳) 등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민족 독립의 쟁취를 소리 높여 역설하였다. 마지막 연사 임종봉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강연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일본 경찰이 총격을 시작하였다. 총을 맞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임종봉의 모습에 군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몽둥이와 낫을 들고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갔다. 이 때 일본 군경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여 1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밖에도 3월 28일 야로면, 4월 3일 가야면 매안리, 4월 7일 봉산면 술곡리에서 각각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어 일본헌병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다.

    • 창원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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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3‧1운동

      창원군내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3일 삼진(三鎭 : 鎭田‧鎭北‧鎭東面)에서 일어났다.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피신한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이 재의거를 계획하고 비밀리에 새로운 동지와 많은 민중을 규합,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때 연도의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만세시위 행렬이 사동(社洞)다리에 이르렀을 때, 일본헌병 및 보조원 8명과 현지의 일본재향군인 30여 명이 출동, 사격 발포하여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을 독려하던 김수동(金守東)이 총에 맞아 즉사했다. 이때 옆에 있던 변갑섭(卞甲燮)이 태극기를 다시 잡아들고 적중으로 돌진하자, 일본헌병은 칼을 빼어 그의 양어깨를 내리쳐 숨지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였으나 결국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확인된 부상자만도 22명에 달하였다.
      삼진운동 이후 창원군내의 항일저항의식은 한층 고조되어 일본인의 상점 철수를 종용, 협박하는 한편, 일본인에게 고용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또한 이날 웅동면 마천리에서도 500∼600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웅천읍을 향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연도의 군중이 자진 호응하여 시위군중의 수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진해로부터 일본헌병 6명과 경찰 4명이 급파되면서, 총검으로 군중을 구타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여 군중은 해산하고 32명이 검거되었다. 그밖에 창원읍에서 3월 23일과 4월 2일에 걸쳐서 6,000∼7,0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11일에는 가덕도(加德島)에서 400여 명이, 4월 29일에는 상남면 파사정에서 5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 경주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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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3‧1운동

      1919년 3월 9일 경산군 고산면 사월리(沙月里) 교회 목사 김기원(金基源)은 대구의 만세 시위운동을 전해 듣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만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경주군 경주면 도동리(道東里) 교회의 목사 박내영(朴來英)과 교회의 영수 윤기효(尹琪涍), 박문홍(朴文泓) 등을 만나 대구 만세 시위운동을 전해 주고 만세 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1919년 3월 11일과 12일 밤에 도동리 교회에서 박내영 목사 등이 교회 신도 5, 6명과 만나 3월 13일 경주 큰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박문홍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경주경찰서는 시위를 열기로 한 3월 13일 새벽 박내영 목사의 집과 교회 관계자의 집을 수색하여 태극기를 발견하고, 박내영 목사와 박문홍 등 15명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시위를 주도한 자들이 모두 검거됨에 따라 3월 13일 시위는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경주읍의 작은 장날인 3월 15일,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애국청년 박봉록(朴鳳祿), 서봉룡(徐鳳龍), 박무훈(朴茂勳), 최성렬(崔聖烈) 등이 주도하여 12일 밤 박문홍 집에서 만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경찰들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도한 이들을 검거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경주 도동리교회의 만세 시위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3월 15일 재점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내영 목사와 시위를 주도한 박영조(朴永照), 박문홍, 김학봉(金學鳳) 등에게는 징역 10월, 최창수(崔昌壽)에게는 징역 8월, 손석봉(孫石鳳), 최성렬(崔聖烈)에게는 징역 6월, 김성길(金成吉), 박봉록에게는 징역 5월, 김성필(金晟弼), 김철(金喆)에게는 징역 4월이 각각 선고되었다. 경주의 만세운동은 3월 8일과 10일의 대구 만세 시위운동으로부터 촉발되었으며, 이를 전한 것이 경산 고산면의 교회 목사였다는 점에서 기독교회 간의 폭넓은 네트워크 및 3‧1운동에서 교회의 역할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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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3‧1운동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 등은 사립 동화중학교(同和中學校) 교장 전홍표(全鴻杓)의 지도를 받아 많은 애국 동지를 규합, 오후 1시 30분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부산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과 수비대에 의해 시위 군중은 일단 해산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다시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일제히 봉기하여 거리를 시위 행진하자, 군중이 가세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주동 인물들은 붙잡혀 구금되었다. 그 뒤 4월 2일 윤태선(尹泰善)의 지휘 아래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 등 청소년 60여 명은 제2차 의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주동 인물들은 잡혔다.
      이 결과 전후 3번에 걸친 독립 만세 운동으로 검거 된 주동 인물만도 46명에 달했다. 밀양의 독립 만세 운동은 항일애국정신을 견지해 온 선진 애국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이어받은 애국 청소년들이 주동하여, 민족 저항심을 끝까지 발휘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 한편, 4월 4일 단장면의 표충사(表忠寺)에서도 승려 이장옥(李章玉)‧이찰수(李刹修)‧오학성(吳學城)‧손영식(孫永植)‧김성흡(金性洽)‧구연운(具蓮紜)‧오응석(吳應石) 등이 주동이 되어 대룡리 단장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주동 인물 364명이 검거되고, 그 중 71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4월 6일 부북면 춘화리에서도 김응삼(金應三)‧김내봉(金來鳳)‧김성수(金聖壽)‧김영환(金英煥)‧김응진(金應振) 등이 주동하여 농민 500∼600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헌병대에 의하여 해산었다. 헌병에 의해 53명이 붙잡혔으나 주동 인물들은 피신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훈계, 방면되었다.

  • 전라
    • 남원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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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3‧1운동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德果面長) 이석기(李奭器)는 재종제 이성기(李成器), 면직원 조동선(趙東先) 등과 비밀리에 회동하여, 이날 신양리(新陽里) 도화곡(桃花谷)에서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맞이해 만세운동을 계획, 각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가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그리고 식수하기 위하여 도화곡에 나온 800여 명의 면민들과 탁주를 같이 나누며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선동, 면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이 때 남원읍에서 헌병분대장 및 일본군 다수가 무장을 갖추고 자동차로 출동하여 여러 사람을 구속하니, 이석기‧조동선 등은 모든 것은 자기들의 책임이라고 하여 주재소에 남고, 다른 사람은 일단 귀가하게 하였다. 덕과면 만세운동은 남원군민에게 자극을 주어 4일의 남원장날을 기하여 1천여 명의 군중이 광한루(廣寒樓)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남문쪽을 향하여 만세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헌병분대 앞에 당도하였으나, 일본군대의 무차별사격으로 시위대열은 해산하고 8명이 현장에서 순국, 10명이 중상을 입고 20여 명이 붙잡혔다. 그 뒤 군내에서는 6명의 면장과 7명의 면서기가 사직원을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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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3‧1운동

      3월 1일 서울에서 온 인종익(印宗益)이 전주 천도교구실에 「독립선언서」 1천 수백 장과 독립운동의 행동 방법을 전달하였다. 천도교구 직원 김진옥(金振玉)‧배상근(裵祥根) 등이 천도교구실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천도교 신자 김태경(金太京)‧민영진(閔泳鎭)‧서호순(徐鎬淳)‧유선태(柳先泰)‧유원(柳謜) 등은 전주 읍내의 도로, 기타 요소 및 각 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한편 개신교계는 신흥(新興)학교와 기전(紀全)여학교가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김가전(金嘉全)‧김종곤(金鍾坤)‧윤건중(尹建重)‧이수연(李守淵)‧최종삼(崔宗三) 등이 학생들을 동원하였고, 김한순(金漢淳)‧박태련(朴泰鍊)‧유병민(柳秉敏)‧최종삼‧함의선(咸義善) 등은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일부 학생들과 신흥학교 지하실 등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주읍 장날, 정오경 남문에서 울려나오는 인경 소리를 신호로 천도교‧개신교 신자,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150명이 남문시장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기전 여학생들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신흥학교와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시위군중은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大和町)을 지나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앞까지 행진하였다. 우편국 앞에서 총을 발사하는 일제 경찰과 부딪친 만세 시위대는 일시 해산하였다가, 오후 3시경 다시 모여 본정(本町) 우편국까지 행진하였다. 일제는 헌병과 소방대원 약 50명을 동원하여 군중에게 물을 끼얹고 소방 갈고리로 부상을 입혔다. 시위군중은 밤에도 2~30명씩의 집단으로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 날의 만세 운동으로 전주 읍내에서 3백여 명이 검속되었다. 3월 14일 박상선(朴尙鮮)‧백남두(白南斗) 등 약 3백 명이 완산정(完山停) 완산교 부근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본정(本町) 2정목까지 진출하였다. 3월 17일 초포면(草浦面) 송전리(松田里) 들판에서 동민들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3일 전주 장날에는 수천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군청‧경찰서‧재판소가 위치한 큰 거리를 지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긴급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고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3월 24일 삼례면(參禮面) 삼례리 삼례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3일 김봉근(金奉根)은 일본기를 게양하고 장사를 계속하는 상인을 찾아가 철시를 요구하는 등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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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 3‧1운동

      진안군 마령면 출신의 오기열(吳基烈)‧전영상(全永祥)이 1919년 3월 6일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3‧1운동 관련 문서 3매를 작성하여 진안면‧마령면 평지리 등에 부착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진안의 3‧1운동은 3월 25일 진안읍 장날에 시작되었다. 수백 명이 참가한 만세 시위는 왜경과 헌병대의 출동으로 해산되었다. 4월 3일 주천면(朱川面) 주양리(朱陽里)에서 김주한(金周漢) 등이 사립화동(華東)학교의 학생 양해관(梁海寬) 등을 권유하여 화동학교 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밤에 주민‧학생 약 60명이 동리 앞 논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4월 6일에는 마령면(馬靈面) 평지리 뒷산에서 김구영(金龜泳)‧오기열(吳基烈)‧전영상(全永祥)‧황해수(黃海水) 등이 주도하여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2일에는 성수면(聖壽面) 도통리(道通里)에서 전경원[언](全京元[彦])의 주도로 수십 명이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3일 마령 장날에는, 오기열, 전보익(全補益) 등의 주도로 마령 시장(마령면 평지리)[현 마령면 평지리 1264 일대]에서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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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면 3‧1운동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던 태인면의 김현곤(金玹坤)‧박지선(朴址宣)‧송수연(宋洙連) 등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김부곤(金富坤)‧김순곤(金淳坤)‧김용안(金龍安)‧김진근(金鎭根)‧김진호(金鎭皓)‧백복산(白福山)‧송덕봉(宋德奉)‧송영근(宋榮根)‧송진상(宋鎭相)‧송한용(宋漢鏞)‧오석흥(吳錫興)‧유치도(柳致道)‧최민식(崔民植) 등과 3월 5일 태흥리 송수연의 집에 모여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현곤은 비밀결사 ‘15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논의를 주도하였다. 3월 7일에는 서울에 유학 중이던 김달곤(金達坤)‧송문상(宋文相)이 이들과 합류하여 계획을 논의하고, 3월 16일 태인 장날에 헌병대의 정오 타종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태인면 사무소 서기였던 김현곤은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수천 장을 등사하였다. 3월 16일 태인 장날, 정오 타종을 신호로 태인 장터(정읍군 태인읍 태성리)[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05 일대]에 모인 군중에게 박지선‧송진상‧송한용 등은 몇 명씩 짝이 되어 준비해 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5~6명의 청년은 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청년들 약 200명과 함께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의 만세소리에 시장에 모였던 수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밤이 되자 태인읍을 가운데 두고 사방 산마루에서 횃불이 오르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렸다. 이러한 야음(夜陰)을 이용한 산상 만세와 소집단의 만세는 10여 일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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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 3‧1운동

      임실 지역의 3‧1운동은 3월 12일 임실읍 장날 임실읍 장터(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소재)[현 임실읍 이도리 762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헌병과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흩어졌다가 밤이 되자 다시 1,000여 명이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에는 청웅면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오후 9시경 구고리(九臯里)에서 1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진해산하였다. 7~16일에는 박용식(朴庸植)‧이강세(李康世)‧이기섭(李起燮)‧이성의(李聖儀)‧최종수(崔宗洙)‧한기수(韓淇洙)‧한도수(韓道洙) 등이 구고리에서, 박준창(朴準昌)‧정필조(鄭弼朝) 등 약 150명은 남산리(南山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석두리(石頭里)‧옥전리(玉田里)에서도 약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21일에는 구고리와 남산리 주민 15명이 임실경찰서에 몰려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석방 시위를 하였다. 3월 20,21일에는 지사면(只沙面) 방계리(芳溪里)에서 김영필(金泳弼)‧최기현(崔基鉉)‧최상학(崔相鶴)‧최영렬(崔永烈)‧한인석(韓麟錫)이 50여 명의 군중에게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한 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3일 갈담장날에는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에서 엄길영(嚴吉永)‧이중혁(李重赫) 등이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신덕면(新德面)의 나학용(羅學用)‧한정교(韓正敎) 등이 삼길리(三吉里)와 신흥리(新興里)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김제룡(金濟龍)‧문성술(文成述)‧송귀남(宋貴男)‧송성학(宋性學)‧최극삼(崔極三) 등이 성수면 오봉리(五峰里)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2일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 천도교 교구실에서 김영원(金榮遠)이 전교사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부를 받아 선거리(仙居里)‧입석리(立石里)‧학산리(鶴山里) 등지에 붙이고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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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군 둔남면 3‧1운동

      1919년 3월 10일 10시경 오수공립보통학교(임실군 둔남면 오수리)[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400]의 학생들은 첫 수업이 끝난 후 운동장에 모여 교사 이광수의 지도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놀란 일본인 교장이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당부하여 만세 운동은 곧 잠잠해졌다. 어린 학생들에 의한 소규모의 만세 운동이었지만, 오수보통학교의 만세 운동은 임실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3‧1운동이었다. 이후 오수 장날인 3월 23일 오수읍 장터(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소재)[현 오수면 오수리 325일대]에서 2차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의 만세시위를 사전에 면밀히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은 지역 유지인 오병용(吳秉鎔)‧이기송(李起松)‧이만의(李萬儀)였다. 이들은 천도교인 및 개신교인들과 연락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여 최대 2000여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이 날 저녁 남원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파견한 무장 병력이 출동하여 총을 발포하자 만세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가, 300~400명 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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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3‧1운동

      1919년 2월 중순경 도쿄(東京) 유학생 정광호(鄭光好)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8선언서」를 광주 청년들에게 전달하였다. 서울의 개신교 신자들과 광주의 개신교 신자 김철(金喆, 본명 金福鉉)‧최흥종(崔興琮)과의 사이에 만세 운동에 관한 연락이 있었다. 3월 5일 밤 양림동(楊林洞)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강석봉(姜錫峰)‧김강(金剛, 숭일학교 교사)‧김용규(金容圭)‧서정희(徐廷禧)‧최병준(崔炳俊)‧최영균(崔瑛均)‧최한영(崔漢泳)‧한길상(韓吉祥)‧황상호(黃尙鎬) 등이 회합을 갖고 3월 8일 큰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준비와 연락 문제로 3월 10일로 연기되었다. 광주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광주군 광주면 부동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74 일대]에 약 1천 명이 모여 시작되었다. 양림동 쪽에서 개신교인들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에서 모여들었다.
      지산면(芝山面)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들이 몰려왔다. 시위 군중이 모여들자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만세 시위 주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시위 행렬이 서문통을 지나 광주지방법원(광주군 광주면 북성정 14)[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3가 1-11]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광주군 성내면 성안)[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가 35 충장서점]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위 행렬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무장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여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선두가 되어 30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3일에는 광주읍 큰 장날을 이용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일부는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6일에는 송정면(松汀面) 송정리(松汀里) 정거장 앞 광장에서 보통학교 학생 및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한편 기독교인이자 제중의원(濟衆醫院)[현 광주기독병원]의 회계로 있던 황상호 등은 문서 배포를 통한 독립운동 확산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중의원 지하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제1호는 1919년 3월 13일 300부가 제작되었고, 제4호까지 발행되다 일본경찰에 의해 적발되었다.

  • 함경도
    • 명천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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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천 3‧1운동

      명천 3‧1운동의 최초 시위는 3월 14일 하가면 화대동에서 일어났다. 누가 주도한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날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은 집집마다 알고 있었다. 오전 11시에 5,000여 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전개, 시위 군중이 헌병분견소 앞에 이르자 헌병들이 사격 발포하여 5명이 즉사했다. 이 소식에 격분한 하가면민 1,000여 명이 이튿날인 15일에 화대시장에 모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시위 군중이 면장을 구타하고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자 헌병이 총격을 가해 4명이 즉사했다. 이 날 시위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풍신(董豊信)은 곧바로 시위 현장으로 달려 나와 만세 시위를 이끌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1921년에 17살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 16일에는 아간면 시장에서 400여 명이 시위를 벌이자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키고 시장을 폐쇄했다. 3월 17일에는 상고면 보촌동에서 보촌학교 학생과 중평동민이 시위를 일으켰다. 3월 18일에는 우시장에서 7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 헌병의 발포로 2명이 즉사했다. 3월 22일에는 운만대 선지곡에서 4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4월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4월 8일에는 서면 우동동에서 우동사립학교 교사가 주도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4월 14일에는 서면 명남동에서 군중 200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4월 18일에는 상운북면 하장동 시장에서 300여 명이 시가를 돌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 성진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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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진 3‧1운동

      성진 3‧1운동은 3월 10일에 성진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시위는 그리어슨(Robert Grierson, 具禮善) 목사가 운영하는 욱정교회 기독교인들이 준비했다. 강학린(姜鶴麟)‧안성윤(安聖允)‧이효근(李孝根)‧서유진(徐有珍)‧배민수(裵敏洙) 등이 주도하여 3월 7일 그레이스 목사관 구내에서 독립선언서 및 격문 3만 매를 인쇄했다. 3월 10일 오전 10시경 그리어슨 목사가 운영하는 제동병원 앞에 5,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시위 군중은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했다. 시위는 오후에도 이어졌다. 기독교계 보신학교 학생 40여 명이 일본인 상가, 경찰서, 우체국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기독교인 200여 명도 학생 시위대를 따랐다. 밤 11시 경에는 임명면 농장동에서 보신학교 교사 2명이 주도하여 기독교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 오전 10시에도 7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제동병원 앞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이 시가를 행진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1명이 즉사했다. 이날 오후 보신학교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성진면의 시위 소식을 들은 학동면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학동면의 시위는 4일 간 계속되었다. 학동면 허씨(許氏) 문중에서는 3월 12, 13일 양일 간에 걸쳐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3월 14일에는 하천동에서 200여 명이 산 위에 올라가 종과 북을 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학성면에서는 3월 12일에 250여 명이 산위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 원산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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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 3‧1운동

      원산은 함남에 자리한 도시로서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대표적인 무역항이었다. 원산의 3월 1일 만세시위를 준비한 사람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남감리교회 목사였던 정춘수였다. 그는 민족대표인 이갑성과 오화영이 서울로부터 전해온 3월 1일 독립선언식 소식을 듣고 장로교와의 연대시위를 준비했다. 장로교 전도사인 이가순과 감리교 전도사인 곽명리를 불러 서울에서 독립운동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가순은 곧바로 장로교 전도사인 이순영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늦게 도착될 때를 대비해 급히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다음날 정춘수는 곽명리를 서울로 보내 자세한 소식을 알아오도록 했다. 곽명리는 서울에서 민족대표인 오화영을 만나고 역시 민족대표인 김창준의 소개로 독립선언서 100매를 받아 2월 28일 오후에 돌아왔다. 정춘수는 곧바로 감리교와 장로교 지도자 11명을 소집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다음날인 3월 1일에 서울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의했다. 곧바로 준비에 들어가 주모자 중 13명이 시내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이끌기 위해 지역을 분담했다. 그리고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일은 때마침 원산 장날이었다. 정춘수는 아침에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식이 열리는 서울로 출발했다. 이가순은 곽명리가 가져온 독립선언서 중 50매를 함경남도 각 관청에 발송했다. 이순영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와 자신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감리교계인 광명학교 학생들에 건네며 배포를 부탁했다. 오후 1시 30분에 울린 종을 신호로 광명학교와 장로교계인 배성학교 학생들이 교문을 빠져나와 독립선언식이 열리는 상시장을 향했다. 장로교 지도자인 차광은의 지시를 받은 배성학교 학생 4명은 거리에서 수백 매의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오후 2시에 13인의 주동자들은 약속한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학생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오후 4시에 인력거에 올라탄 곽명리, 이가순 등의 지휘로 천여 명의 시위대가 악대를 앞세우며 일본인 시가지로 행진했다. 원산경찰서 앞에 도착한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부르자 경찰, 헌병은 물론 소방대원들이 물감이 든 물을 뿌리며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시위대는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헌병과 경찰이 공포를 쏘자 시위대는 일단 흩어졌다가 다시 원산역 앞에서 오후 6시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찰과 헌병은 이날 93명을 검거했고 이튿날에도 주동인물 체포에 나섰다.
      3월 1일 원산 시위는 민족대표로 참여한 정춘수가 추진한 시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과 직접 연락을 취하며 독립시위 준비를 했고 독립선언서도 직접 서울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기독교 연대 시위로서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함께 시위를 준비했으며,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연대했다. 흥미로운 것은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이다.

    • 정평 춘유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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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 춘유 3‧1운동

      정평 춘유 3‧1운동은 3월 13일 신하리 장날에 일어났다. 정평면과 주이면의 만세 시위 소식을 들은 한장번(韓壯蕃)이 여러 동지를 모아 주동했다. 오후 1시 한장번의 만세 선창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신상리와 신포리로의 시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시위 군중은 4,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오후 6시 시위 군중은 자진 해산했으나 밤늦게 신상리와 신포리에서 다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신하리에서는 9시 반쯤 기독 교회에서 1,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고 행진했다. 10시가 넘자 시위대는 5,000여명을 넘어섰다. 신상리에서는 밤 늦게 수백 명의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헌병의 발포로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만세 시위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 북청 노덕면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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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 노덕면 3‧1운동

      북청 노덕면 최초의 만세 시위는 3월 8일에 일어났다. 오전 9시 천도교인과 학생 약 25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한 후 영덕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3월 10일 정오에는 조석권(趙錫權)‧이욱성(李郁性)‧이기주(李基柱) 등이 주동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무렵 천도교 북청교구장인 김태종(金泰鍾)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은 조직적인 시위를 모의하고 있었다. 3월 8일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장날인 3월 1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시위 전날인 3월 10일에 경찰이 천도교당을 급습하여 김태종을 비롯한 시위 주도자들을 잡아갔다. 3월 11일에 시위를 계획, 주도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6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 다른 면의 천도교인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경찰은 면소재지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했다. 3월 12일과 13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모의하고 격문을 배포하다가 발각되는 일이 일어났다. 3월 14일에는 1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다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 황해도
    • 안악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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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 3‧1운동

      안악군은 민족운동과 신문화운동의 근원지로 이미 안악 의거와 105인 사건을 통해 많은 희생과 곤욕을 겪었다.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 서울과 도내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도 감히 거사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은홍면 온정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 참배차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온 박치간(朴治幹)‧정계로(鄭啓老)‧유용원(柳龍源) 등이 주동해 3월 11일에 일어났다. 은홍‧대행‧서하 등 3면에서 모인 수백 명의 군중은 박치간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은 뒤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선두로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3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하였으며, 주도한 이들은 검거, 구금되었다. 그 뒤 안악읍에서는 3월 28일, 기독교인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되었으나 25명이 강제 검속된 채 해산하였다.
      4월 2일에는 다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500∼6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9일 용문면 동창리에서도 만세시위가 크게 전개되었다. 이 날 12시경 예배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기독교인과 배영학교(培英學校) 생도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때 온 장터의 장꾼들과 주민들이 가세해 시위군세는 온 시가지를 진동시켰다. 이에 당황한 헌병주재소에서는 안악읍의 헌병‧경찰의 증원을 받아 시위대열을 해산시키고 닥치는 대로 검거, 구금하였다. 구금된 50여 명에게는 갖은 악랄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 중 만세시위에 앞장섰던 정정렬‧김은애‧장학래 등 여성들에 대해서는 윤리도덕을 외면한 나체수욕(裸體羞辱)을 자행하였다. 일제 측의 이러한 만행을 알게 된 민중은 격분하여 다시 일어섰다. 청년들은 4월 8일 제2차 동창포만세시위를 거행했으나, 일제는 처음부터 야만적인 무력행동으로 시위행렬을 저지했기 때문에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밖에 3월 31일 문산면에서 70여 명의 군중이 4월 7일 용순면에서 김관섭(金寬燮)‧김기형(金基瀅) 등이 주도하여 400여 명의 군중이 각각 만세시위를 벌였다.

    • 해주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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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 3‧1운동

      해주에서는 3‧1운동 전인 2월 20일 이미 서울에서 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 등이 보낸 김명신(金明信)에 의해 독립선언서 300장과 최성모의 서신이 해주읍 남본정(南本町)의 기독교회 목사 오현경(吳玄卿)에게 전달되었다. 오현경은 그날 밤으로 황학소(黃鶴巢)‧임용하(林容夏)‧이동혁(李東赫)‧최명현(崔明鉉)‧김창현(金昌鉉)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협의, 거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각 교인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남본정 교회에서는 기독교인 18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오현경 목사 주재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3월 9일 봉영화(奉永華)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읍내 남욱정(南旭町) 장터에서 다시 만세운동을 크게 일으키기로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0일 옹진군의 천도교인 수백 명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들고 해주읍내로 대거 진입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전날 만세운동을 일으키지 못했던 기독교인과 이성룡(李成龍)을 비롯한 읍내 주민들이 기다렸다는 듯 합세하게 되면서, 만세시위대열은 해주읍의 큰 거리를 뒤덮었다. 이는 출동한 일본 기마헌병에 의해 70여 명이 붙잡히고 시위 해산되었다.
      한편, 읍내의 기생 일동도 4월 1일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나와 독립만세시위행진을 벌였다. 여성들의 궐기는 민중에게 다시 용기를 북돋아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시위군중은 3,000명이 넘었다. 그밖에 3월 9일 최보은(崔溥殷)이 주도 한 석동면에서 만세운동이 있었고, 10일에는 서변면, 12일에는 추화면 청단(靑丹) 장터에서 6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7일에는 청룡면 영양리에서 이기봉(李起峰) 등의 주도로 2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 가좌면 취야리 장터와 서변면 문정리, 4월 6일 장곡면 죽천리, 7일 동운면 삼정리, 8일 운산면 백정리 등지에서 각각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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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 3‧1운동

      수안의 최초 3‧1운동 시위는 3월 3일 읍내면에서 일어났다. 천도교 수안교구장 안봉하(安鳳河)는 3월 1일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받아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2일에는 천도교 시일(일요일) 집회에 모인 천도교인에게 다음날 있을 시위 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그날 밤 시위 준비 사실이 발각되어 헌병대가 시위를 계획한 사람들을 잡아갔다. 3일 다행히 검거를 피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 등 천도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130여 명이 천도교당 앞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곧이어 각 면에서 모여든 천도교인들이 행진에 합세했다. 시위 군중이 헌병분견소에 몰려가 주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헌병들이 총격을 가해 9명이 즉사했다. 3월 7일에는 수구면 석달리에서 천도교 전교사 이승필(李承邲)이 주도하여 천도교인 100여 명이 홀동 장날을 이용해 헌병분견소 앞에서 분견소 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9일에도 석달리 헌병분견소에 약 150명의 군중이 몰려가 시위했다. 3월 7일과 10일에는 연암면 은율리에서 경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3월 10일과 18일에는 천곡면 두대동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수안군의 삼일운동은 천도교회의 주도로 일어났으며, 읍내면, 수구면 석달리, 연암면 은율리, 천곡면 두대동 등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3월 3일 읍내면의 시위는 황해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치열한 항쟁이었다.

    • 연백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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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백 3‧1운동

      연안면에서는 기독교회가 주도하여 시위를 계획했다. 2월 28일 서울로부터 온 약 100장의 독립선언서를 받은 손창현(孫昌鉉) 목사는 곧바로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각 면이 날짜를 정하여 연안면을 향해 행진하는 방식의 시위를 준비했다. 만세 시위 날짜는 봉북면, 호동면, 호남면, 해성면 순으로 정해졌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과정에서 3월 2일 경찰에 발각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3월 15일 제일 먼저 봉북면에서 시위 군중이 연안면 동문 쪽으로 행진했다. 이튿날인 16일에는 호동면의 시위 군중이 연안면의 남문 쪽으로 행진했다. 헌병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시내 진출에 성공했다. 18일 장날에는 호남면과 해성면 시위 군중들이 연안면 서문 쪽으로 행진했다. 여기에는 해성면의 면서기와 구장들도 참가했다. 이 날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은 2,000여 명을 넘었다. 21일에도 연안면에서 2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3월 23일에는 해월면 백란리에서 기독교계 학교 교사와 이장이 주도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날 벽란도에서도 기독교계 학교 교사와 학생의 주도하에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3월 24일에는 유곡면 금곡리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나와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30일에는 배천면 연남리 장터에서 창동학교 교사인 송흥국(宋興國)‧이정식(李廷植)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경찰이 발포하여 강제해산시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음날인 3월 31일에는 유곡면 영성리에 있는 홍현시장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운산면에서는 면 직원이 주도한 시위 행진이 있었다. 은천면 옥산리에서는 헌병분견소 습격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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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 3‧1운동

      재령 지역의 최초 3‧1만세운동은 3월 6일에 남률면 해창리에서 기독교인의 주도로 일어났다. 해창리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다니던 윤택진(尹澤振)이 귀향하여 시위를 준비했다. 해창리의 기독교인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수백 장을 그렸다. 함께 모의하던 동지가 체포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이른 3월 6일 밤에 시위를 감행했다. 한 때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점령하기도 했다. 재령면에서는 장날이자 일요일인 3월 9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재령면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3일이었으니 6일간의 준비기간을 가진 것이었다. 9일 오후 3시 반쯤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시위행진 중 군중이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3월 10일 북률면 내종리 장날에는 기독교인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000여 명이 넘는 시위군중이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자 헌병이 발포하여 1명이 즉사했다. 3월 28일에는 상성면 청석두리에서 교사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4월에 들어서도 곳곳에서 시위가 계속되었다. 4월 2일에는 재령면에서 명신학교와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고, 4일에는 남률면 해창리에서 장날을 맞아 시위가 일어났다. 5일에는 하성면 신덕리에서, 7일에는 재령면과 서호면 신환포리에서, 9일에는 은룡면 신유리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 장연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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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 3‧1운동

      장연면의 최초 시위는 3월 11일 장연면 장날에 일어났다. 오후 1시에 여현구(呂鉉九), 강예봉(姜禮鳳) 등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경찰이 주동자를 체포하자 시위 군중 200여 명은 경찰서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은 시장을 폐쇄하고 여관을 뒤지며 단속을 벌였다. 장연면의 시위는 다음 장날인 3월 16일에도 이어져 3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11일에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4월 5일에 속달면 상태탄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는 1,000여 명이 참가했다. 보통학교 학생과 서울로 유학 갔다가 무기휴학으로 귀향한 여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4월 8일과 11일에는 후남면 남호리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남호리의 남창 장날인 11일에 일어난 시위에는 1200여 명이 참가했다.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 문을 부수고 면서기를 구타했다. 4월 16일에는 용연면 도경리에서, 18일에는 대구면 송천리에서, 22일에는 해안면 몽금포리에서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몽금포리 시위에서는 1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의 발포로 해산했다.

  • 평안도
    • 강계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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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계 3‧1운동

      평안북도 강계에서는 3월 3일 입관면(立館面)에서 천도교인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독립선언서를 살포한 것이 첫 시작이다. 이날 만세운동에서는 헌병에 의해 20여 명이 검거되어 군중이 해산되었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영실중학교(英實中學校) 교사 김경하(金京河), 정준(鄭雋), 명신학교(明新學校) 회계 한봉민(韓奉珉) 등이 천도교 간부들과 영실중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한 뒤, 4월 8일을 거사일로 잡으며 재시작되었다. 이 날 군중 수천 명이 남장대(南將臺) 예배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기마헌병의 무차별사격으로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 피검자 중 29명이 신의주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4월 16일 어뢰면(漁雷面) 풍룡리(豊龍里)에서도 수천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10여 명이 현장에서 피살, 20여 명이 붙잡혔다. 이후 만주로부터 국내에 침투해 들어오는 독립군과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이 강계를 경유하여 압록강을 건넜기 때문에 강계군을 향한 일본의 경계는 전시 하의 계엄지구와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 속에서도 10월 24일에는 만주의 독립군이 종남면사무소(終南面事務所)를 습격하고, 헌병분견소와 압록강 연안의 감시초소 20여개소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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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 3‧1운동

      강서군의 3‧1운동은 장날인 3월 3일 기독교측의 최승택(崔昇澤)‧박상현(朴尙鉉)‧박의현(朴義鉉)‧홍석찬(洪錫燦) 등과 천도교측의 이진식(李鎭植)‧김병주(金炳疇)‧황재호(黃在鎬)‧변경식(邊景植)‧송현건(宋賢健) 등이 주도, 4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날 오전 10시경,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한 군중은 곧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이 헌병‧경찰‧군대를 출동시켜 군중에게 총격을 퍼부어, 현장에서 9명이 사망, 4명이 부상 당했으며,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증산면에서는 3월 2일 용덕리(龍德里)‧오흥리(吳興里)‧두만리(斗滿里) 등 여러 동리 주민들이 모여 집룡리(集龍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3월 4일 기독교인 등 5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본 헌병대가 이를 해산시키려고 하자,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 1명과 헌병보조원 3명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반석면의 사천장터에서는 3월 4일 일본 헌병의 총격에 맞선 투석전이 벌어져, 13명이 죽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함종에서는 3월 8일 강기팔(姜基汃)‧김용수(金龍洙)‧이능훈(李能勳)‧오영선(吳永善) 등이 주도하여,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행진에 들어가기에 앞서 군중에게 끝까지 무저항주의로 나아가자고 호소하는 한편, 일본 헌병출장소 소장에게도 그 뜻을 전달하고 무력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이 끝날 무렵 헌병이 총격을 퍼부어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40여 명이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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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 3‧1운동

      당시 천도교 곽산교구장이었던 김경함(金庚咸)은 정주 읍내에서 김진팔(金鎭八)이 주재한 천도교 간부들의 비밀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 영창학교(永昌學校) 직원들과 거사를 준비하여 3월 3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날 천도교측이 「독립선언서」를 역과 주변 각 동리에 배부하고, 기독교측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집집마다 나누어준 뒤, 집회를 열자 읍내에 모인 군중은 1,000여 명이 되었다. 김경함이 먼저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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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 3‧1운동

      맹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6일 덕천(德川)의 천도교구 공선원(共宣員) 현성재(玄聖才)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며 시작되었다. 맹산의 천도교 교구장 문병로(文炳魯)‧김응철(金應哲)‧방기창(方基昌)‧정덕화(鄭德化)‧김치송(金致松)‧이관국(李寬國)‧방진원(方鎭垣) 등 천도교의 여러 간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교인 50여 명이 가두로 진출,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다가 헌병의 출동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 날부터 군내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다가 3월 10일, 일제는 천도교인 1명을 만세시위운동 주동자라며 헌병주재소에 잡아다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 53명이 헌병주재소로 가서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측은 군중 53명을 모두 뜰 안에 들어오게 한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 박내준(朴來俊)‧방윤격(方允格) 등 53명을 한 편에 열 지어 세운 뒤 한 사람씩 모조리 사살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50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3명만이 겨우 살아나왔다. 그러나 맹산의 군중은 굴하지 않고 연일 산발적인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야만적 무력행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순국하고 부상하였다.

    • 벽동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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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 3‧1운동

      벽동읍에서는 3‧1운동 전에 이미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직접 연락의 줄이 닿아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무르익어갈 무렵, 산악지대 동포들도 이 민족적 거사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의주군 월화면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벽동에 밀파하였다. 또한, 천도교 측에도 의주의 최석련(崔碩連) 등으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있었다. 벽동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 벽동교구에서 3월 10일의 제1세교조 순도(殉道) 기념일을 기하여 수백 명이 기념식을 거행한 뒤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거리로 나오자, 주민들과 기독교인이 이에 가세하여 독립만세시위 행진을 전개, 자진 해산하였다. 또 30일 200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출동으로 해산하였고, 31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군중 300여명이 독립만세시위 행진을 벌이다가 역시 일본군의 출동으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4월 1일 밤 11시경, 1,000여 명의 군중이 천도교인들이 쏘아올린 폭죽(爆竹) 신호에 따라 사방에서 일시에 읍내로 몰려들어 실력행사를 하려 하자, 일본수비대와 헌병대가 황급히 출동, 발포하여 1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5명이 구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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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 3‧1운동

      2개 군 사이에 위치한 모락장은 장날에는 서로 내왕이 빈번하였고, 두 곳에 모두 장로교파 교회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원장리와 모락장 중간지점에 있던 반석면의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조진탁(曺振鐸)은 평양의 3‧1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독립선언서 몇 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원장리에 들러 그곳 교회 지도자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 등을 만나 반석‧원장 두 교회 합동으로, 3월 4일 원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은 모락장교회 목사 송현근(宋賢根)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송현근은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헌병 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을 비롯한 10여 명이 검거되고, 송현근은 반석교회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나, 3월 4일 오전 10시 원장리에서는 계획대로 독립 만세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때 최능현과 송현근은 모락장의 만세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앞서 세운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군중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지들이 헌병대 유치장 안에 갇혀 있으니 구출하자고 호소하였다. 사실을 알게 된 군중은 반석면 상사리를 향해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모락장에 거의 도착해서 고갯길을 막 넘으려는 참에, 주변 숲 속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헌병들이 총격을 가하여 앞서 가던 청년들이 하나 둘 씩 쓰러졌다. 총격에 의해 순국한 사람은 13명이었고, 중경상자는 40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돌과 맨주먹으로 일본군에 대항하자, 모락장은 삽시간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생각한 헌병주재소장 사토(佐藤)와 헌병 보조원 2명은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달아나는 그들을 쫓아가 살해하였지만, 사토의 아내와 어린애는 약한 아녀자라 하여 살려주었다. 사토 아내는 그 길로 즉시 강서에 있는 평양헌병대 본부로 달려가 사천의 시위 사실을 알렸다. 이에 일본 헌병대는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400명을 검거, 20일 간 고문한 끝에 49명을 평양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곳의 3‧1운동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참변과 함께 대표적인 유혈 참극의 하나였다.

    • 삭주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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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 3‧1운동

      이승훈(李昇薰)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산악지대 동포들도 민족적 거사에 참여시키기 위해 의주군 월화면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삭주로 밀파하여 사전에 만세운동을 협의토록 하였다. 한편, 천도교측에서도 의주의 최석련(崔碩連) 등을 통해, 이미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보냈다. 천도교인 장대길(張大吉)은 교인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 복제하여 각 면에 전달하고, 3월 5일 오후 2시를 기하여 각 면별로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 읍내에서는 기독교인‧천도교인‧주민 3,000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의해 4명이 현장에서 순국, 20여 명이 검거되었다. 3월 9일 읍내에서는 기독교인 50여 명이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고, 3월 31일과 4월 1일에도 수천 명의 군중이 헌병 분견소를 포위하고 유리창을 부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렇듯 3월 31일부터 계속하여 삭주군 외남면 대관리에서 수천 명이 되는 군중이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일본군은 4월 5일 삭주 읍내의 헌병 5명을 증파하였다. 4월 6일 6,000∼7,000명 군중 가운데 약 200명으로 조직된 결사대가 앞장서 저지하는 일본군에 대항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 때 현장에서 6명이 즉사하고 40명이 잡혔다. 4월 11일 새벽, 읍내 기독교회당에서는 돌연 화재가 발생하여 교회당이 전부 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행은 정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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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 3‧1운동

      성천군은 군사적 요지로서 경술국치 이후에는 천도교세(天道敎勢)가 크게 떨쳐, 3‧1운동 때 천도교인이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천의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천도교 성천교구장이던 쌍룡면 상평리 출신 이돈하(李燉夏)가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렸던 대교구장회의에 참석했다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2월 28일 급히 돌아오면서부터 계획되었다. 이돈하는 즉시 천도교 중진들과 만나 거사를 계획하고 3월 4일 오전 11시 읍내 천도교구당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모인 군중은 남녀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4,000여 명이었으며,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 뒤에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각기 도장을 가지고 참석하였다. 군중은 12시 정각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상부리(上部里)헌병대로 시위 행진해갔다. 이들이 헌병대 정문 앞에 도달하자 일본헌병과 조선인 보조원 10여 명이 일렬 횡대로 서 있다가 돌연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그 자리에서 20여 명이 사망, 70여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500여 명이 붙잡혔다. 성천군에서는 이 밖에도 일곱 번의 운동이 더 있었고, 시위에 참가한 군중의 총수는 5만 1000여 명, 사망자 36명, 부상자 60명, 피검자는 535명에 달해, 이 곳의 독립만세운동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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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 옥상면 3‧1운동

      첫 만세 시위는 3월 7일에 일어났다. 옥상면(玉尙面) 삼하동(三下洞)에 살던 박경득(朴擎得)이 김시항(金時恒)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다. 당일 옥상면 삼하동, 삼상동(三上洞), 당목동(棠木洞)에서 약 50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두 사람은 3월 31일에 다시 삼하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4월 2일에도 박경득과 김시항이 주도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날 삼하동, 삼상동, 당목동에서 출발하여 낮 12시에 옥상면사무소 앞에 운집한 시위군중은 3,000여 명에 달했다. 김시항과 박경득은 면 직원인 최영균(崔英均) 등에게 ‘우리는 이미 독립을 선언했으니, 오늘부터 면사무소를 폐지하고 새로 조직할 자치민단에 면사무소와 비품, 재산 등을 넘기라’고 압박했다.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를 점거하고 각종 비품과 문서철 7책, 현금 193원 15전을 압수했다. 이후 10여 일간 자치민단이 면의 사무를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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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 3‧1운동

      영원군 내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7일 최종식(崔宗植)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인 35명이 독립선언서를 배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만세운동에서는 일본헌병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35명 전원이 잡히고 말았다. 그 뒤 3월 9일 오후 1시경 2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은 다시 읍내 밖에서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헌병분견대로 행진해가서 전날 구금된 만세운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헌병이 시위를 제지하며 총포를 발사하는 틈을 타, 별실에 갇혀 있던 피검자들은 문을 부수고 몰려나와 군중과 합세하여 다시 독립만세시위 행진에 들어갔다. 연도에서 이를 지켜보던 주민 또한 시위 대열에 뛰어들어 만세를 부르니 군중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 때 덕천 읍내에서 파견된 장교 이하 보병 10명은 군중 뒤에서 무차별사격을 감행하여, 독립만세 시위대는 현장에서 15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부상하였으며, 70여 명이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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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 3‧1운동

      평북 의주는 중국으로 가는 관문으로서 전통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1914년에 신의주부가 생기면서는 위성도시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인 유여대 목사가 동교회를 맡고 있었다. 유여대는 1919년 2월 중순에 선천에서 열린 평북장로회 노회에 참석했다. 이 때 서울을 다녀온 이승훈으로부터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이승훈은 장로교 장로로서 기독교계를 이끌었던 민족대표였다. 유여대가 서울로부터의 독립운동 준비 소식을 기다리던 중 2월 27일에 정주교회 영수인 조형균이 찾아와 서울의 독립선언식 준비 소식을 알렸다. 2월 28일 유여대는 중국 안동현에서 온 김병농 목사, 그리고 정명채, 김두칠, 안석응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사를 표시한 20여명과 함께 양실학교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거사일시는 3월 1일 오후 2시 30분으로, 장소는 서교회 광장, 즉 양실학교 운동장으로 결정했다. 먼저 양실학교 교사인 정명채, 김두칠, 홍석민은 독립선언서가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2・8독립선언서〉를 새벽까지 300매 정도 등사했다. 태극기도 제작했다. 그리고는 인근 지역 기독교인들과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 학부모 등에게 다음날 모임 장소와 날짜를 알렸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안석응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평안북도 도청과 경찰부 등 관공서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3월 1일 오후 2시 30분에 서부교회 광장에는 700~800명의 군중이 모였다. 주동자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시위대에 나누어주었다. 먼저 찬미가를 부르고 유여대 등 주동자들이 단상에 올라 개회를 선언했다. 김병농 목사가 기도를 하고 난 후 유여대가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의 식사를 마치고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하는데 때마침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 200여 매가 도착했다. 유여대는 미리 준비한 〈2・8독립선언서〉가 아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 독립창가를 부른 후 김이순과 황대관이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시위대는 양실학교 학생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 날 최석련이 교구장으로 있는 천도교의주대교구에서도 만세시위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연대했다. 헌병대가 시위대를 막고 해산에 나섰다. 시위대를 해산시킨 후에는 유여대 등 주동자 10여명을 검거했다. 3월 1일 의주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인 유여대가 직접 준비했다.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연대한 시위였고, 시위현장에서는 천도교인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연대했다. 〈2・8,독립선언서〉를 준비했지만, 극적으로 독립선언서가 시위 현장에 전달되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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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 3‧1운동

      천도교 중진 중의 한 사람인 김진팔(金鎭八)이 서울에서 열린 49일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독립운동에 관한 밀령을 받아 정주교구장 최석일(崔晳一)‧서인화(徐仁和)‧백중빈(白重彬)‧이근배(李根培)‧박윤길(朴允吉), 곽산교구장 김경함(金庚咸) 등과 서주동 박형석(朴瀅錫)의 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들은 1919년 3월 31일 정주장날을 이용,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군민동원의 책임을 맡은 김석보(金碩甫)가 서면과 해산면을 돌아 읍내로 귀환하던 중, 헌병보조원의 검문에 솜바지 속에 숨겨 두었던 독립선언서 1장을 발각 당했다. 그리하여 31일의 만세운동은 처음부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 날 만세운동에 참가한 시위군중은 2만 5,000명이나 되었다. 시위현장에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군중을 독려하던 최석일이 두 팔과 목이 잘려 숨지자, 뒤따라 행진하던 김사걸(金士傑)이 그가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어 들고 앞장서 나갔다. 이때 헌병보조원들은 시위 군중을 쇠갈고리로 찌르고 총을 난사하였다. 그 결과 현장에서 순국한 사람이 92명, 검거된 사람만도 70여 명에 달하였다. 그래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의 3‧1운동 중에서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대학살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또, 이날 오산학교(五山學校)가 있는 용동에서도 별도의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3월 31일의 만세운동과 민족대표로 서울로 올라간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李昇薰)에 대한 보복으로, 4월 2일 밤 천도교 정주교구‧ 오산학교와 기숙사‧용동교회 등을 모두 불 태우는 한편, 4월 10일에는 읍내 기독교회당에도 방화하였다. 이처럼 정주군에서는 18회의 거사에 참가한 인원은 약 5만 5,000명, 사망자 120명, 부상자 525명, 피검자 567명을 낸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된 지역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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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 3‧1운동

      창성읍에서는 3‧1운동 전에 이미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직접 연락의 줄이 닿아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계획이 무르익어갈 무렵, 산악지대 동포들도 이 민족적 거사에 참여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여 의주군 월화면 교회목사 송문정(宋文正)을 창성에 밀파하였다. 창성읍내 교회장로이던 강제희(康濟羲)는 이승훈의 밀지를 전해받고, 강정식(康貞植)‧전봉재(全鳳梓) 등과 만나 거사 계획을 세워 4월 1일 읍내와 각 면에서 동원된 약 2,000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군 50여 명은 헌병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함으로써 박찬소와 강정식이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네다섯 명에게 중상을 입었다.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강제희는 이봉근(李鳳根)의 도움으로 4월 2일 만주로 망명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한편, 동창면 대유동에서는 4월 1일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4월 4일에는 천도교인 5일에는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청산면 학송리에서는 4월 5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헌병대와 충돌, 6명 사망, 25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청산면 청룡리에서도 4월 6일 천도교인 70여 명이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헌병대와 충돌하여, 7명 사망, 5명이 부상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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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3‧1운동

      평양의 3월 1일 만세시위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준비했다. 각자 준비는 따로 했지만, 3월 1일에는 연대시위를 펼쳤다. 먼저 장로교 지도자들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3월 1일 오후 2시에 독립선언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각 장로교회에 3월 1일 오후 1시부터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 교정에서 고종의 죽음을 추모하는 봉도식을 거행할 예정이니 참석하라는 통지서를 발송했다. 장로교계 학교인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제작했다. 감리교에서는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신홍식 목사의 제안에 따라 독립시위를 준비했다. 감리교 지도자들은 남산현교회에서 오후 1시에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고 본격적인 준비와 연락에 들어갔다. 감리교계 학교인 광성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천도교 평양대교구는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와 연락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2월 하순에는 평양대교구 산하 교구장회의를 소집하고 연락을 기다렸다. 2월 28일 평양대교구는 평북 선천의 천도교구장인 김상열로부터 평양역에 사람을 보내라는 전보를 받았다. 평양대교구장 우기주가 직접 평양역으로 나가 서울에서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이하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우기주는 독립선언서를 교구장회의에 참석한 천도교 지도자들을 통해 각 지역에 배포했다. 그리고 천도교인들에게 고종봉도식 행사를 알린 후 급히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그리고 장로교와 감리교에 독립선언서를 보내고 태극기도 제작했다.
      마침내 3월 1일 오후 1시에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고종봉도식을 개최했다. 먼저, 장로교인들은 오후 1시에 숭덕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고종봉도식을 거행했다. 기독교인은 물론 지역 유지들까지 참여하면서 참석자 수는 3천 명을 훌쩍 넘었다. 선교사 마펫(S.A.Moffett)은 내빈석에 착석했고 사복형사들은 좌중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봉도식은 찬송가와 기도로 조의를 표하며 간단히 끝났다. 그리고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었고 도인권 장로가 단상에 뛰어올라 독립선포식 개회를 선포했다. 숭덕학교 교사인 곽권응은 그 자리에 모인 기독교인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했다. 독립선언식은 김선두 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정일선 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선두・강규찬 목사가 연설했다. 이어 윤원삼 장로가 독립만세를 삼창하자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곽권응은 애국가 제창을 지휘했다. 평양 경찰서장이 나서 직접 해산을 요구했지만, 운동장에 모였던 장로교인들은 학교 밖으로 빠져나가 시내로 진출했다.
      감리교인들도 오후 1시에 남산현교회에서 고종봉도식을 간단히 끝내고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사회는 김찬흥 목사가, 독립선언서 낭독은 주기원 목사가, 연설은 박석훈 목사가 담당했다. 감리교 유사인 김연실, 교사인 채애요라 등은 태극기를 참석자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감리교인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천도교인들도 같은 시각에 고종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행진을 벌였다.
      세 군데서 출발했지만, 시내에서는 곧바로 연대시위가 펼쳐졌다.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한 장로교 시위대는 천도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진출한 천도교 시위대와 합세했다. 그들이 평양경찰서 앞에 이르자 경찰과 헌병들이 가로막고 나섰다. 이 때 남산현교회에서 출발한 감리교 시위대까지 합류했다. 세 방면에서 시작된 만세시위가 오후 3시쯤 평양경찰서 앞에서 하나의 대오를 형성한 것이다. 시위대는 일본인이 거주하는 신시가지로 들어가 평안북도청과 평양재판소 앞 대로를 누빈 후 평양역 광장으로 나아갔다. 평양부청, 평양중학교, 평양형무소 앞도 거쳐 갔다.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대해 만세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자, 평양 인근 지역과 학교에서는 급히 시위대를 조직해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에는 낮에 집결한 숫자의 배가 되는 시위대가 평양경찰서를 포위했다. 경찰은 소방대를 동원해 물을 뿌렸으나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았다. 오후 6시 쯤 경찰서 창문이 날아온 돌에 깨지자 헌병과 경찰은 공포를 쏘며 시위대 검거에 나섰다. 발포에 분격한 시위대가 경찰에 달려들면서 양자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오후 7시쯤 수비대 군인들이 출동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112명이 검거되었고 6명이 부상했다. 경찰 한 사람도 다쳤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악대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 날부터 철시를 단행한 상인들은 9일까지 상점 문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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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남포 3‧1운동

      진남포는 평남에 자리한 신흥 항구도시였다. 3월 1일 진남포 만세시위는 감리교계 학교인 삼숭학교 교장 홍기황이 이끌었다. 홍기황은 평양에 가서 신홍식 목사에게 서울의 독립선언식 소식을 듣고 2월 27일에 돌아왔다. 그는 삼숭학교 교사와 전도사들과 의논해 서울과 마찬가지로 3월 1일 오후 2시에 신흥동 감리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합의하고 독립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홍기환은 감리교인은 물론 천도교인들과도 연락을 취했다. 감리교인으로서 부두미곡중개조합원인 노윤길은 부도노동자들에게 연락했다. 또한 그는 평양의 감리교측 김찬흥 목사를 찾아가 그의 소개로 장로교 장로인 윤원삼에게 독립선언서 100매를 받아 3월 1일 첫 열차로 돌아왔다. 노윤길이 홍기황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자, 홍기황은 500개의 태극기 제작을 서두르는 한편, 삼숭학교 교사인 조두식에게 독립선언서 등사를 부탁했다. 조두식은 독립선언서를 원본으로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발췌한 원고를 작성해 홍기주와 함께 삼숭학교 등사기로 800매를 인쇄했다. 홍기황은 주동자들에게 오후 2시에 신흥교회 종이 울리면 독립선언서를 거리에서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삼숭학교 학생 100여명을 포함해 신흥감리교회에 5백여 명이 모여 고종 봉도식을 끝내고 홍기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군중들은 오후 3시 경에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내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진남포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자 경찰이 발포했다. 이로 인해 김기준과 그의 부인이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경찰은 그날로 평양에서 보병부대원을 파견 받아 만일에 대비했다.
      3월 1일 진남포 만세시위는 감리교인 주도로 일어났으며 천도교와의 연대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3월 1일 첫날부터 일본 경찰의 발포로 인해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선천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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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 3‧1운동

      선천은 평북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로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과 평양과 신의주를 잇는 평의선이 지나가는 교통요지였다. 평북 선천에는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양전백 목사가 북교회를 맡고 있었다. 양전백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105인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신성학교 성경 교사 홍성익과 독립선언 준비를 했다. 2월 27일 홍성익은 신성학교 교사인 김지웅, 남교회의 목사 김석창 등과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신성학교 학생과의 연락과 조직은 김지웅이 맡았다. 다음날인 2월 28일 양전백은 3월 1일 서울에서 열리는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기 위해 선천을 떠났다. 김지웅은 양전백으로부터 며칠 전에 받아 두었던 〈2・8독립선언서〉를 신성학교 학생들에게 건네며 등사를 지시했다. 3월 1일 독립시위를 위해 별도의 독립선언서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혹시 그것이 도착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등사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김지웅은 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전한 1월 28일 자 〈매일신보〉기사와 베이징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 기사의 번역문, 그리고 운동가인 ‘행보가’ 등도 인쇄하도록 했다. 태극기 제작도 학생들의 몫이었다. 시위 준비가 한창이던 2월 28일 밤에 서울에서 민족대표인 박희도의 부탁으로 역시 민족대표인 김창준 목사에게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받은 이계창이 선천에 도착했다. 그는 김지웅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3월 1일 평소대로 12시에 열리는 신성학교 기도회에 참가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이 모였다. 이 때 홍성익이 단상에 올라 예배를 인도하는 대신 칠판에 종이를 붙인 뒤, ‘금일 대한 독립’이라고 혈서를 쓰고 연설을 했다. 그리고 학생 140~150여명이 교사 정상인의 지휘 아래 교문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들은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미리 독립시위 소식을 알고 있던 보성여학교 학생 60여명도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학생들은 남교회와 북교회를 지나 시내로 진출했다.
      천남동 시장에 이르는 동안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2천여 명에 달했다. 시장 한 가운데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김지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에게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신문 기사의 번역문과 운동가가 실린 전단지들이 배포되었다. 독립선언식을 마친 시위대는 정상인의 지시를 따르며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채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인 후 시가지를 돌며 행진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천도교 선천교구장인 김상열은 2월 28일에 귀향하면서 평양에 독립선언서를 건넨 바 있었다. 3월 1일에는 선천교구 지도자들이 거리에 나와 김상열이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선천에도 일본군이 즉각 투입되었다. 보병 77연대 장교 이하 25명이 기마경찰대와 함께 출동해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일본군의 발포로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던 기수 강신혁이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오후 6시에 시위대가 완전히 해산했다. 그날 밤 경찰은 신성학교 기숙사와 교직원 사택, 교회 목사관 등을 수색해 주모자와 시위 참가자를 체포했다. 이 날 시위로 170여명이 검거되었다.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3월 1일 선천의 만세시위는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학생과 종교 연대로 준비되었으며, 시위 현장에서는 천도교와의 연대가 실현되었다. 만세시위 현장에서는 서울로부터 온 독립선언서와 <2‧8독립선언서>가 동시에 배포되었다. 또한, 진남포와 마찬가지로 첫날부터 일본군의 발포로 희생자가 생겨났다.

    • 안주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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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 3‧1운동

      안주는 평남의 평야지대에 자리한 상업도시이자 교통요지였다. 평양과 신의주를 잇는 평의선과 신안주와 개천을 잇는 개천선이 안주를 통과했다.
      안주에서는 장로교 계통의 동예배당을 세운 김찬성 목사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서울의 독립선언식 준비 소식을 듣고 2월 28일에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자 다음날 시위를 하기로 결심하고 아들인 김화식을 비롯해 20대의 교회 청년 지도자 10여명을 긴급 소집했다. 이들은 박의송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교인들에게 다음날 독립선언식 소식을 알렸다. 3월 1일 오전에는 김화식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식 준비를 계속했다. 이날도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3월 1일 오후 5시 안주면 서문 밖에 동예배당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청년 지도자들은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시위대와 함께 시내로 진출해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헌병대는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독립선언서를 압수했다. 수십 명의 시위대가 헌병대 문 앞에 모여 밤을 새우며 옥에 갇힌 주모자들을 격려했다.

  • 간도
    • 간도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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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 3‧1운동

      국내에서 3‧1운동의 거센 물결이 일어나자 간도 지방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간도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2일 서간도 지방의 중심지인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와 통화현 금두(通化縣金斗)에서 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 만세시위운동을 벌인 데서 비롯되었다. 북간도 지방의 만세운동은 다음날인 3월 13일, 이 지방의 중심지이고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는 용정(龍井)에서 처음 일어났다. 이날 정오, 천주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용정 북쪽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는 약 1만 명 가량의 한국인이 모여들었다. 용정의 한국인이 거의 다 참석했고, 부근 1백리 안의 동포가 거의 다 모여들어 독립축하회 식장의 넓은 뜰을 꽉 메웠다. 독립축하식은 김영학(金永學)의 ‘독립선언포고문’의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만세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은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맹부덕(孟富德)이 거느린 중국 군대로 하여금 독립만세운동을 저지하게 했다. 군중의 위세를 꺾을 수 없음을 안 맹부덕은 선두의 대한독립기를 빼앗고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사격을 감행, 1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한 채 해산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북간도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계속되어 17일의 용정, 20일의 훈춘(琿春), 26일의 백초구(百草溝), 31일의 고집지(高集地)의 만세시위운동을 비롯, 4월 중순까지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다


조선총독부는 만세시위의 확산 원인을 ‘선동적 문서의 배부’에서 찾았다.

 학교나 교회에 비치한 등사기로 등사한 각종 유인물과 격문, 그리고 신문 등은 3‧1운동을 확산하는 촉매제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 뿌려진 〈조선독립신문〉의 영향으로 전국 곳곳에서 지하신문이 발간되었다. 지하신문은 만세시위 소식을 방방곡곡에 알려주는 배달부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과 함께 간단한 구호를 적은 전단․낙서․포스터, 시위계획이나 투쟁방침을 알리는 격문․사발통문, 관리의 사퇴나 일본인의 퇴거를 요구하는 경고문․협박문 등의 유인물들이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3‧1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 태극기와 애국가가 등장했다.

 시위 현장에는 다양한 깃발이 등장했는데, 태극기를 가장 많이 흔들었다. 태극기는 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작했다. 학생 이외에도 여성 노동자, 기생, 농민,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시위현장에서만 태극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면사무소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걸기도 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거는 마을이 등장했다. 만세시위에는 새로운 운동가도 등장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 숨죽이며 부르던 애국가도 만세시위에서는 당당하게 제창되었다. 3‧1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애국가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위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신문과 각종 유인물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은 만세시위를 널리 알렸다. 시위대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나라 상실의 고통을 절감했고 독립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체포압송되는 3·1운동 주도학생들 체포압송되는 3·1운동 주도학생들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의 탄압

3‧1운동은 3월 1일 시작되어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되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인구의 10%나 되는 200만 여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중 7,500여 명이 살해당하였고 16,000여 명이 부상하였다. 그리고 49개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에 탔다. 경찰의 검거자 수는 무려 46,000여 명에 달했다. 1919년 3월부터 12월까지 검거자 중 19,054명이 검찰로 송치되어 이 중 7,8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일본이 조선에 실시한 치안 법령은 다음과 같다. 통감부가 1907년에 제정한 「보안법」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물론 문서‧그림의 게시나 기타 언동까지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해에 제정한 「신문지법」과 1909년에 제정한 「출판법」은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의 신문 발행을 억압하고 구국사상을 담은 많은 서적을 몰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오늘날의 경범죄 처벌법에 해당하는 「경찰범 처벌규칙」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은 한국인의 항일 투쟁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엄격히 단속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조선형사령」을 공포하여 일본의 「형법」과 기타 형사 관련 법령들을 한국에 적용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급히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제령 제7호)」을 제정해 만세시위에 참여한 한국인에게 적용하고자 하였다.

독립운동자의 경우,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가 전체 유죄 판결의 71.7%로 압도적이었다. 이어 「형법」의 소요죄 위반이 21.8%에 달했다. 「출판법」과 「제령 제7호」는 각각 3.5%와 2.1% 밖에 되지 않았다. 3‧1운동을 모의한 민족대표 대부분은 「보안법」, 「출판법」, 「형법」의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면사무소나 주재소에 방화하거나 순사와 헌병을 살상하는 등 폭력시위를 벌인 민중들은 더 엄한 처벌을 받았다. 징역 5년 이상이 43명, 10년 이상이 21명, 무기징역이 5명에 달하였다. 중형의 경우, 「형법」 상의 소요죄‧방화죄‧살인죄‧강도죄‧사기죄가 적용되었다.
3‧1운동의 탄압 사진 3‧1운동의 탄압 사진2 3‧1운동의 탄압 사진3 (왼쪽부터) 시위학생을 체포하는 일경, 3‧1운동 피해자들, 폐허가 된 제암리 민가 @독립기념관 제공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

3‧1운동은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었다.

첫째,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므로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른 저항운동이었다.〈2․8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는 ‘무단전제이자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라고 비판하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고, 종교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통치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이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서>는 일본을 민주주의의 공적이라 비판했다. 나아가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자는 독립투쟁에 나선 ‘우리 편’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은 자유, 정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반포한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둘째, 3‧1운동은 세계를 향해 한국의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도 세계 평화는 없다고 외쳤다.
당시 한국 독립이 곧 평화의 실현이라는 평화담론이 광범히 퍼져 있었다. 대한국민의회가 3월 20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동양의 평화는 한국의 자주 독립에 있다’라고 단언했다. <기미독립선언서>도 2천만 한국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면 ‘동양의 영구한 평화’는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3‧1운동을 모의한 종교계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의 하나로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로 하여금 어디까지나 광명정대하게 하라’고 하여 비폭력의 원칙을 제시했다.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상징하는 직접행동이 바로 만세시위였다. 3‧1운동은 두 달 넘게 이어진 반일투쟁이었지만,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3‧1운동으로 빛났던 민주주의‧평화‧비폭력의 정신은 독립운동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3‧1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활약했던 학생, 청년, 노동자, 농민, 여성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며 대중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8독립선언주도인물들 제암리사건을 조사하는 미국인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와 부인 앨리스 (왼쪽부터) 2‧8독립선언주도인물들, 제암리사건을 조사하는 미국인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와 부인 앨리스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