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순
1848 ~ 1907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공적개요 :
- 1895년 광주의진 참여
- 1906년 창평에서 거의, 의병장으로 활동, 남원·화순·능주·화개 전투에서 승전
- 1907년 연곡사에서 전사 순국
관련장소 :
- 고광순의병장 순국지(연곡사)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774
관련콘텐츠 :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혈손(血孫)으로 태어나다
고광순(高光洵, 1848. 2. 7~1907. 10. 16) 선생은 헌종 14년(1848) 전남 담양군 창평면(昌平面) 유천리(柳川里)에서 장흥고씨(長興高氏) 명문 후예로 태어났다. 자를 서백(瑞伯), 호를 녹천(鹿川)이라 하였다. 창평의 남쪽 고개를 녹갈(鹿渴)이라 하고, 계곡물을 유천(柳川)이라 불렀는데, 고광순이 그 위에 거주하였으므로 여기서 호를 취하였다고 한다. 생부는 정상(鼎相)이고 생모는 김씨였으며, 양부(養父)는 경주(慶柱)이고 양모(養母)는 허씨였다.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錦山)에서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3부자의 가문이었다. 고광순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학봉(鶴峰) 고인후의 봉사손(奉祀孫)이었으니, 태어나서부터 절의정신에 남달리 깊이 배양되어 있었을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고광순은 재능이 탁월하였으며 매사 처신에 신중하였다. 어려서 외조부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얼마 후 그가 종가(宗家)의 양자로 가게 되자, 외조부는 외손들 가운데 제일뽑이를 빼앗겼다며 아쉬워하였다고 전해질 만큼 총명한 아이였다. 그는 상월정(上月亭)에서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면서도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남다른 데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덕을 좋아하는 군자로 칭송되었다. 고광순은 젊은 시절 한때 과거에도 응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던 과장(科場)의 실태를 목도하고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대로 귀향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일제 침략세력과 권세가들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혼란한 시국상황을 개탄하고 울분의 나날을 보내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사를 그르친 괴수들과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무찔러야 하옵니다 국왕에게 상소 올려
고광순에게는 그가 의병전선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명분이 주어져 있었다. 그 첫째는 일제의 극심한 경제침탈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을사조약 늑결 후 광무황제의 밀칙이 내려와 있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저명한 의병장의 직손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도 의병을 일으켜야 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한 직후부터 일제는 대한침략정책을 한층 강도 높게 진행시켜 갔다. 1895년에 들어와 나라에 대변고가 두 번이나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고광순은 드디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게 된다.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그것이다. 일제는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러시아에게 빼앗김에 미쳐 1895년 8월 배일파의 핵심인물로 명성황후를 지목, 극악무도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민족 자존에 일대 타격을 가하는 단발령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고광순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창하였다. 을미사변에 뒤이어 그 해 11월 17일(음) 단발령이 내려지고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전국을 요동하게 되자, 고광순은 호남지방 유림계의 명사들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등과 함께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문을 전파하면서 처음으로 의병 규합에 나섰다. 제천, 춘천, 강릉, 진주, 안동, 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 정국상황과 인심의 향배가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치던 무렵이었다. 1896년 2월(음)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의병 규합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되자, 기우만을 주축으로 한 의사들이 광주향교에 집결해 규칙을 정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숙의하였다. 기삼연도 이때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로 합세해 왔다. 이어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등과 함께 나주로 가, 주서(注書) 이학상(李鶴相)을 주축으로 일어난 나주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광주, 나주, 담양 등지에서 규합된 의병은 기우만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2월 30일 광주를 본부로 삼아 집결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결집된 호남의병은 관군의 탄압과 회유로 인해 곧바로 와해되고 말았다. 영남지역의 의병을 격파한 여세를 몰고 호남으로 행군해 온, 이겸제(李謙濟)가 거느린 관군의 공격을 받아 의병 측에 가담한 해남군수 정석진(鄭錫振)이 희생되는 등 강력한 탄압을 받은 데다,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해산을 명하게 되자, 의진은 더 이상 항거할 명분을 잃고 자진 해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의사들은 형식상 임금의 명령인지라 의진을 해산하기는 했지만, 그 명이 국왕의 본심이 아니고 적신(賊臣)들의 협박 때문에 내려진 것임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광순과 기우만 등의 선비들은 비분강개하여 전국 각지를 전전하고 동지, 지사들을 규합하면서 재기의 기회만 노리게 되었다.
광무황제(고종)로부터 의병들을 독려하는 서한 애통조를 받고 토적복수를 맹약하다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집안 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 재기의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명분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실천을 우선시하는 강직한 선비로 성장하였다. 특히 촌수로는 집안 할아버지뻘이 되지만 오히려 한 살 아래였던 고제량(高濟亮)과는 의기가 상합하는 사이였다. 고제량은 어려서부터 기량이 활달하여 병정놀이를 할 때도 항상 주장이 되어 진용을 벌이거나 대오를 편성하곤 하였다. 말하자면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던 셈이다. 한번은 고제량이 농담조로 고광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왜적들이 나라를 삼키려 하는데 그대 같은 유술(儒術)을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이 말을 들은 고광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서생의 가슴 속에는 저절로 갑병이 들어있는 법이니 그대와 같은 호기(豪氣)는 다만 한 모퉁이를 감당할 뿐이외다.
이 대답으로 미루어 고광순의 대쪽 같은 절의정신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광순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러한 망국조약이 체결된 직후부터 그 동안 비교적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국 인심이 크게 격동되어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호남지방에서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전선에 동참한 최익현이 의병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주장 최익현 이하 참모들이 남원, 전주에서 출동한 진위대에 의해 체포 당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울분을 참지 못한 고광순은 그해 11월에 다시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장성의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모여 의병을 일으켰다. 백낙구는 원래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초토관(招討官)으로 실전을 치른 경험이 있었으며, 이 무렵 전남 광양 산중에 은거하던 중 동지 10여인과 함께 수백 명의 주민을 모아 의진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고광순은 백낙구 등과 함께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 날 모인 군세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진의 순천 공략전은 실패로 귀착되었다. 이후 고광순은 더욱 분발해 의병전선에 전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이 무렵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받고 감격해 하며 토적복수를 스스로 맹약하였다. 그는 드디어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인근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놓고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이때 모인 인원이 모두 5백여 명에 이르렀고, 의병장에는 고광순이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
부장(副將)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高光秀) 좌익장 고광훈(高光薰)
우익장 고광채(高光彩) 참모 박기덕(朴基德)
호군(護軍) 윤영기(尹永淇) 종사(從事) 申德均(신덕균) 曺東圭(조동규)
고광순이 의진을 편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무렵, 때마침 남원에서 일어난 양한규(梁漢奎) 의병장으로부터 남원읍 공략을 위한 연합작전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이에 호응해 그는 즉시 부하 의병을 이끌고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양한규는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영, 호남지역으로부터 1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활동에 들어갔던 인물이다. 그 휘하의 정예병 1백여 명은 1907년 2월 13일 밤 남원성을 기습 공격하여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날이 설날이었으므로 진위대군은 거의 휴가 중이어서 경비가 허술하였기 때문에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원성의 4대문은 의병의 파수 하에 들어가고, 진위대의 무기 군수품 일체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공성 직후 달아나던 진위대 군사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의병장 양한규가 전사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의병은 이튿날 관군의 반격을 받고 참패를 당해 성을 탈출한 뒤 지리산 일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아가 양한규의 처남 박봉양(朴鳳陽)을 비롯해 참봉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의 간부들은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말았다. 고광순이 남원에 당도하였을 때는 양한규 본진이 이미 와해된 뒤였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의진은 남원읍 공략을 단념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고광순 의병은 비홍치(飛鴻峙)를 넘어 담양군 평창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 후 고광순은 능주의 양회일(梁會一),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고 전전하였다. 특히 4월 25일에는 화순읍을 점령함으로써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시켜 버렸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동복으로 진군한 의진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교전한 끝에 사방으로 패산하고 말았다.
지리산 피아골을 거점으로 장기항전 태세를 구축하다
육순 노구의 고광순은 이처럼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10여 년간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는 1907년 9월 의병전략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일제 군경과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를 택한 것이다. 고광순은 지리산을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은 특히 입지 조건이 좋았다.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花開洞), 서쪽으로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험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골의 중심인 연곡사에서 민간의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강력한 일제의 군경과 맞설 만큼의 전력을 축적할 생각이었다. 이에 1907년 9월 11일 고광순을 도독으로 하고, 그 아래에 박성덕과 고제량을 도총 및 선봉으로 삼고, 신덕균(申德均), 윤영기 등을 참모로 정하는 등 편제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행군길에 올라 곡성군 구룡산(九龍山) 아래에 당도하였다. 진용을 강화한 고광순 의병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항전할 것을 계획하고 그에 앞서 무장을 보충하기 위해 동복을 공략키로 하였다. 동복은 오래된 군현으로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처척(妻戚)관계로 정치적으로는 얼룩진 고장이지만 보성에서 남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산중 도회지였다. 북쪽 옹성산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자연동굴이 많고 동쪽 운월산도 순천과 경계되어 있어 우복동(牛腹洞) 같아 점령만 하면 당분간 견딜 만한 곳이었다. 이에 고광순 의진은 9월 15일 새벽에 헌병분견소를 공격했지만, 일제 군경의 반격으로 도포사(都?士) 박화중(朴化中)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전투상황에 대해 일제 측 정보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9월 15일 오전 6시 폭도(의병: 필자주) 약 60명이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보조원 2명이 교전했으나 중과부적이라 광주로 철수하였다. 미야가와(宮川) 보좌관은 보좌관 6명, 순검 1명을 이끌고 특무조장 1명, 병졸 7명과 협력, 토벌했으나 적은 시체 한 구를 버리고 도주한 뒤였다.(전남폭도사)
의병은 그 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선봉장 고광수의 집이 있는 남원군 이백면 효기리에 숙영한 다음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갔다. 즉 남원에서 곡성, 광양,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즈음 그는 또한 지리산 부근의 영남, 호남 각지로 의병을 소모하는 격문을 연이어 발표하기도 하였다. 고광순 의병이 화개동을 지나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자리 잡은 연곡사(?谷寺)에 도착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신라 진흥왕 4년(543년)에 창건한 이 절은 임진왜란 때 한 번 불탔으나 그 뒤 다시 중수했었다. 하지만 일제가 의병을 탄압하던 당시에 사찰 건물을 불태웠고, 일부 중수된 건물은 다시 6, 25전란으로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사찰 건물은 그 뒤 다시 복원된 것이다.
머지 않아 광복이 오리라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앞세우고 최후의 결사 항전
고광순은 이곳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갔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고광순 의병이 지리산에 들어올 무렵, 전북 순창읍의 우편취급소 및 분파소를 김동신(金東臣) 의병이 습격하였다. 충남 회덕 출신의 김동신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무주 덕유산과 정읍의 내장산, 그리고 장성의 백양사 등지를 주로 전전하며 기우만, 고광순 의진과 긴밀한 연계 하에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의병은 순창을 거쳐 구례군 토지면 문수골에 있는 문수암으로 들어왔다. 문수암은 고광순이 주둔한 연곡사에서 북쪽으로 산봉우리 하나를 넘어가면 나온다. 김동신 의병을 추격해 온 일제 군경은 문수암까지 이르렀으나 의병이 자취를 감춘 뒤라 화풀이로 귀중한 문화재인 문수암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일본군은 화개동으로 내려와 주둔하였다. 화개동은 연곡사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연곡사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화개를 일제 군경이 장악하게 되면, 영남지방 의병과의 연락이 끊기게 되므로 고광순 의병이 활동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광순 휘하의 윤영기와 고광수가 주축이 되어 10월 9일 화개동의 일제 군경을 기습하러 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경은 화개동에 집결하지 않고 쌍계사로 향하였다. 화력을 집결시킨 일제는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의병세력에 대해 대탄압을 가할 심산이었다. 곧 지리산이 영, 호남 의병의 활동 본거지로 변모하자, 일제 군경은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고 대대적인 탄압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동원된 일제 군경은 진해만의 중포대대(重砲大隊)에서 파견된 소대 병력, 광주에서 출동한 1개 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의 순경 등으로 의병 측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고광순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
이에 부장 고제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죽음을 함께 할 것을 맹약하였다.
당초 의(義)로써 함께 일어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는가!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피아골을 유린한 끝에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도 만만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화승총 심지에 불을 붙여 완강히 저항한 것이다. 그러나 의병과 일제 군경의 정면 대결에는 워낙 전력 차이가 컸다.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5~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일제 군경은, 고광순의 본가에 불을 질렀듯이, 연곡사 안팎을 모두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연곡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서 이용될 수 없게 한 것이다. 결국 고광순의 희망이었던 축예지계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광순이 순국한 지 며칠이 지나서 우국시인이자 당대의 기록자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연곡사를 찾아갔다. 그는 고광순 무덤의 봉분을 돌보면서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추모시 한편을 남겼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연곡사 교전 직후에, 어느 한 농부가 고광순과 고제량의 시신이 불에 타지 않도록 채마밭에 옮겨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나흘 뒤에는 고광훈이 상포(喪布)를 준비해 가지고 연곡사 터를 찾아갔다. 솔가지로 덮어둔 두 의사의 시신을 절 부근에 임시로 묻고 봉분을 만들어 놓았다. 황현이 연곡사를 찾았던 것은 임시 성분(成墳)한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이렇게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두 의사의 유해는 창평(고광순)과 화순(고제량)의 향리로 옮겨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광순의 부인 오씨는 남편이 순국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 창평 향리 뒷산에 묻혔으며, 장자 재환은 벙어리로 3년 뒤에 죽었고, 차남 역시 장가도 들기 전에 죽었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고광훈의 아들을 양자로 맞아 종가의 대통을 잇게 하였다. 1958년 선생이 산화한 연곡사 옆 서부도 근처 동백나무 숲 아래에는 선생을 기리는 순절비(殉節碑)가 세워졌다. 불탄 그의 생가 터에는 1969년에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친필 현판을 내려보내 포의사에 걸었다. 그리고 포의사 앞에 건립한 사적비(事蹟碑)에는 고광순이 평소 좌우명처럼 삼았던 말을 노산 이은상이 가사체로 만들어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다. 의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기에 침 놓은 것 같고(見義捨身如大腫一針) 이익 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見利殉身卽穿踰一轍) 하셨네. 녹치(鹿峙) 연곡(?谷) 님의 발자취 어느 적에 사라지리까? 그 뜻 그 이름 이 겨레 하냥 만고에 전하리다.
한편 고광순 의진의 선봉장 고광수는 당시 33세의 진사로서 천석꾼의 부자였지만 재산을 모두 의병전선에 바쳤다. 뿐만 아니라 고광순 의진이 머물고 간 뒤 일제 군경이 쳐들어와 집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그도 잡혀 남원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여 강원도 산골과 충청도 해변을 유랑하며 숨어 살았다. 일제하에 숨어 살면서도 의병 가족끼리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고광수의 딸은 임실의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고광순의 딸은 오적암살단으로 유명한 의사 기산도(奇山度)와 혼인하였다. 현재 담양군 창평의 월봉산 기슭에는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녹천 고광순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학봉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최후를 마쳤고, 녹천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다 같이 일본을 상대로 한 의병장이었던 12세 조손(祖孫)이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조국 산천을 오늘도 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19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