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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로 보는 역사의 주인공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바로가기
이남규 1855 ~ 1907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공적개요 :
  • 1893­~1905년 상소를 통해 일제침략 규탄
  • 1906년 홍주의진 지원 및 민종식 의병장을 은신시킴
  • 1907년 피살 순국
관련장소 :
  • 수당이남규선생3대항일투쟁사적비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산 470
  • 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땅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3구
  • 수당이남규선생고택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181-8
  • 수당이남규선생기념관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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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중시하면서도 현실 인식 날카로운 기호유림 학풍에서 수학 


이남규[李南珪, 1855.11.3~1907.9.26(음력8.19)] 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尾洞)에서 부친 호직(浩稙)과 모친 청송(靑松) 심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字)는 원팔(元八), 호는 수당(修堂)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선생의 집안은 고려시대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조선시대 이산해(李山海)와 이경전(李慶全) 등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유가(儒家)의 명문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학문의 전통이 매우 깊었다. 그리하여 선생 또한 후손들에게 문장에 대한 연원을 다른 곳에서 구할 것 없이 가학(家學)에서 구하여야 한다.고 할 정도로 가전(家傳)의 학문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 가학을 익히면서 선생은 7세 때부터 당시 기호유림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성재의 학문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안정복(安鼎福)의 학풍을 잇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의 학문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도, 공리공담에 빠진 공허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이 배어있는 실학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의 투철한 현실인식과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 민족의식은 바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고, 이후 외세 및 일제의 침략을 경험하면서 더욱 심화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문과 급제, 탄탄한 관료의 길 걸었으나 일제의 간교한 술책들 파악하여 직언으로 상소 


그러던 중 선생은 개항(開港) 직전인 1875년 향시(鄕試)인 사마시(司馬試) 양과(兩科)에 합격하였고,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해인 1882년 4월에는 경복궁(景福宮)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행된 정시(庭試)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다음해인 1883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선생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직후 외직인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가기까지, 서학교수(西學敎授),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사간(司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부응교(副應敎), 응교(應敎),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 형조참의(刑曹參議) 등 청환(淸宦)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유가사상을 구현하여 갔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은 일제와 청나라의 세력 각축장(角逐場)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제고하기 위해 명치유신식(明治維新式) 근대화를 꿈꾸던 급진 개화당 인사들을 부추겨 1884년 10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게 하였다. 하지만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간섭으로 실패함에 따라 일제는 실세하였고, 반면에 청나라 세력은 더욱 득세하였다. 이에 호시탐탐(虎視耽耽)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던 일제는 약화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한반도 침략의 호기로 삼아 1894년 5월 7일 군대를 파견하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가속화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우리 정부는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어 외세 개입의 소지를 제거하였지만, 일제는 자국 상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오히려 도성으로 진주시켰다. 선생은 이같이 일제의 침략책동이 노골화하자 [논비요급왜병입도소(論匪擾及倭兵入都疏)]를 올려 그에 대한 대비를 주장하였다. 선생은 이 상소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날 일본 사람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성의 문을 들어왔습니다. 외무관서에서 힘써 이를 저지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웃 나라의 환란(患亂)을 구하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일찍이 구원을 청한 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의 상민을 보호하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일제)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청하지 않았는데 구원을 말한다면 이는 실상을 속이는 것이고, 안전을 보장하는데도 오히려 보호를 내세운다면 이는 우리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중략) 저들(일제)이 소란스럽게 큰 군대를 움직여 우리의 영토로 들어오고 나라의 법금(法禁)도 묻지 않고서 우리의 도성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신은 그 속에 반드시 간사한 꾀가 들어 있을 것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우리의 사람 없음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압니다. (중략) 우리도 마땅히 갑옷을 수선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대비하여야 합니다. 다른 나라 군대가 도성 안에 들어와 있는데 우리가 편안하게 이에 대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선생은 일제의 이심(異心), 즉 침략 야욕을 꿰뚫어 보고 그에 대한 방비와 대비책을 진언하였다. 이 뒤의 역사를 보면 선생이 얼마나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는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간파한 대로 일제는 그 해 6월 21일 일본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뒤, 민씨 정권을 전복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같이 군사 구데타적 방식으로 일제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임금을 능멸하자, 선생은 즉각 [청절왜소(請絶倭疏)]를 올려 이를 규탄하였다. 선생은 여기에서 이렇게 썼다. 

"저 일본 공사가 나라를 방위하고 험한 곳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고 군대로 도성을 둘러싸게 하고, 성(城)과 진지에 자기네 병사들을 벌과 개미처럼 모여 있게 하였습니다. 나라가 있었던 이래 있지 않았던 변고입니다. 또 자주 독립 등의 말을 하면서 겉으로는 충성을 바치는 체하고 속으로는 협박을 일삼습니다. 이 또한 나라가 있었던 이래 있지 않았던 일대 변고입니다. 불경함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또한 저네들(일본)의 의도는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다 하여 우리나라를 우롱하고, 사타구니에 끼고 손바닥에 올려 놓고서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는 우리를 높이는 것 같이 하고는 안으로는 실상 우리를 약화시키며, 밖으로는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이 하고는 안으로는 실상 우리를 외롭게 만듭니다. 또 우리나라가 변고 있음을 엿보고, 우리나라의 구폐를 혁파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으려고 합니다. (중략) 급히 외부(外部)에 엄한 말씀으로 저네들(일본) 자신의 글을 퇴각시키라고 명하십시오. 또 저들(일본)이 동맹을 어긴 죄를 천하와 동맹 각국에 알리십시오. 곧 정부로 하여금 저네들(일본) 나라의 집정자를 책망하여 명분 없는 군대의 철퇴, 무례한 공사(公使)를 죄 주어서 옛 우호관계를 되찾고 서로 도와 의지함이 진실로 두 나라의 다행이라는 글을 주게 하십시오. 저들(일본)이 만약 어리석어 뉘우칠 줄 모르고 혼매하여 깨닫지 못하면 또 한 번 마땅히 관항(關港)을 닫고 조약을 폐기하여 각국과 힘을 합하여 토벌한다면 비록 지자(智者)라도 저들(일본)은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은 내정개선의 미명 아래 자행되고 있던 일제의 정치 군사적 침략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특히 선생은 일제가 침략책동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관문을 닫고 수호조약을 폐기하여 절교하고, 나아가 동맹국들과 연대하여 일제를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친일정권 하에서 일제 토벌을 목숨 걸고 상소한 우승지. 결국 쓰라린 좌천의 길로 


당시 일제의 비호 아래 친일정권이 성립되어 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선생의 이 같은 일제에 대한 단교와 토벌 주장은 생명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나라사랑의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선생은 이러한 거침없는 상소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일제와 친일정권으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임금을 보필하던 우승지 자리에서 밀려나 외직인 영흥부사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의 투철한 반일 민족의식이 퇴색하거나 변색되지 않았다. 그것은 영흥부사로 재직 중에 발생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 사건에 대한 선생의 분노로도 알 수 있다. 1894년 6월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씨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한 일제는 곧 이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하여 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反)외세, 반(反)봉건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봉쇄하고,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선을 자신들의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따라서 개항 이후 조선을 둘러싸고 각축하던 양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싸움은 청일전쟁의 승전국인 일제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하였다. 


일제가 황후까지 시해하는 잔인 무도 패악 정국. 분연히 원수를 갚자고 상소한 관료 


하지만 일제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할양 받은 요동(遼東)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같은 일제의 위약성을 간파한 민씨 세력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이이제이식(以夷制夷式)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여 갔다. 이에 일제는 지속적인 자국 세력의 확대를 위하여 1895년 8월 20일 배일파의 핵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친일정부를 사주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명성황후의 폐서인(廢庶人) 조칙(詔勅)을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매국적 조치가 발표되자 선생은 곧 바로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 討賊復讐疏)]를 올려 격렬하게 맞섰다. 선생은 여기에서 이렇게 썼다. 

"(1895년) 8월 20일에 있었던 일을 어찌 차마 다시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천지의 큰 변고이고, 종사(宗社)의 지극히 욕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원수 놈의 부림이 되어 지존을 짝하신 몸에게 죄를 돌려서 폐하여 서인으로 만든다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8월 22일 내리신 칙명(명성황후의 폐서인 조칙)을 빨리 거두시고, 왕후의 위호를 이전대로 회복하시어 왕태자를 비롯하여 온 나라 신민이 의지할 바를 잃어 방황하는 뜻을 위로하옵소서. (중략) 이어 외무를 맡은 관서에 명하여 일본이 맹약을 어기고 환란을 일으킨 죄를 동맹국 여러 나라에 알리고, 함께 이를 칠 것을 약속케 하옵소서." 

선생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일제의 사주 아래 이루어진 왕후의 폐서인 조치를 신랄하게 규탄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왕후의 위호를 우선 복위시킨 뒤, 일제의 만행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 동맹국들과 함께 일제를 쳐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주장하였다. 일제가 단발령 내리자 관복 벗고 귀향. 군신 상하가 일제와 결전을 벌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뒤따라 일제가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그 해 11월 15일 소위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여 선생은 영흥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향리(鄕里)인 충남 예산(禮山)으로 귀향하였다. 평소 위정척사사상을 견지하고 있던 선생에게 있어 이같은 선택은 신념에 찬 행동이었고, 또 다른 형태의 반일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후 선생은 1896년 안동부(安東府) 관찰사(觀察使), 1897년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1899년 비서원승(秘書院丞),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함경남북도 안렴사(按廉使) 등에 임명되었으나 잇달아 사직하고, 향리에서 칩거하였다. 이즈음 일제는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이던 중,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반도의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갔다. 그리하여 일제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그 해 2월 23일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체결을 강제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영토를 점유하여 갔고, 또 8월 22일에는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고문(顧問)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양해 아래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청토적소(請討賊疏)]를 올려 매국적(賣國賊)의 처단과 일제와의 일대 격전을 주장하였다. 선생은 이 상소에서 이렇게 썼다. 


"불의(不義)로 존재함은 의로움에 망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불의로 사는 것은 의로움에 죽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물며 의(義)가 틀림없이 망했는데도 죽지 않고, 불의가 틀림없이 존재하는데도 죽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박제순(朴齊純) 무리의 매국의 죄를 다스리시고, 원수의 나라(일제)가 맹약을 어긴 죄를 동맹 각국에 포고하시고 군신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일대 결전을 벌이게 하여 주십시오." 


선생은 박제순 등 매국적(賣國賊)의 처단과 군신 상하가 대동단결하여 일제와의 일대 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같이 투철한 반일 민족의식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전개된 상소 투쟁은 당시 사람들에게 선생을 항일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점차 각인시켜 갔고, 또 위정척사 유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게 하였다. 때문에 전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은 1906년 4월 전북 태인(泰仁)에서 거의를 도모하면서 선생의 동참을 부탁하기도 하였으니 당시 선생의 유림에서의 위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민중들에게 각인돼. 의병들의 선봉장이 되고 감옥에서 모진 형벌 받아 


이후 선생은 전 참판(參判) 민종식(閔宗植)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탈환하자 몸소 전투에는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물심양면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종식의 홍주성(洪州城) 의진은 선생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유림의 협조와 지역 주민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이 의진이 홍주성에서 10여 일 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에 패하여 민종식 의병장이 피신하게 되자 선생은 그를 예산 향제(鄕第)인 평원정(平遠亭)에 숨겨 주는 등, 배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부일 주구배가 그 같은 사실을 인지하여 일본군에게 밀고하면서 선생을 없애지 않으면 충청도에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선생과 선생의 장자(長子)인 충구(忠求)는 일본군에 피체되어 공주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한 달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고, 그 해 7월 24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갔다. 


선비는 죽일 수 있을 뿐 욕 보일 수는 없다. 일제에 압송되어 가다 맏아들, 집사와 함께 순국 


이러한 준(準)식민지적 상황이 도래하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고, 특히 해산 군인들이 의진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이제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일본군은 선생에 대한 경계와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다가 1907년 9월 26일 선생이 거처하던 평원정을 포위하고 선생을 포박 압송하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고 꾸짖고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가마가 충남 아사군(牙山郡) 송악면(松岳面) 평촌리(坪村里) 냇가에 이르자 일본군은 길을 멈추고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선생을 회유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칼로 선생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을 따르던 맏아들 충구와 가마를 메고 가던 김응길(金應吉)이 온 몸으로 일본군의 칼을 막았지만, 결국 선생과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