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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 자신의 이름처럼 아홉 번 이름을 바꾼 ‘백범 김구’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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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범 김구’ 선생이 살아오면서 쓴 이름은 아홉 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 조국의 독립에 애쓴 선생은 그 만큼 일제를 피해야 하는 인생을 살아왔는데요. 그 때문인지 살아생전 총 

아홉 개의 이름을 썼다고 하는 사실을 아셨나요?


#2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창암(昌巖)’, 동학을 만나 ‘창수(昌洙)’로 이름을 바꾸다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릴 때 불리던 아명(어릴적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죠. 

창암은 18세가 되던 1893년, 동학에 입도하게 되는데요. 모든 이는 신분과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동학사상과 이러한 세상에 대한 기대와 지향을 담아 

이름을 창수(昌洙)로 이름을 고칩니다. 앞으로 이어질 아홉 번의 개명의 시작이었죠. 


#3 명성왕후 시해범을 죽인 ‘김창수’ 탈옥 후 가명과 법명으로 생활하다 




성인이 된 김창수는 1896년 치하포에서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스치다 조스케를 살해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갖은 고초를 당하던 김창수는 2년 

뒤인 1898년 탈옥을 감행해 성공하는데요. 탈옥수 삼남 지방을 떠돌아다닐 때 자신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김두호(金斗昊)라는 가명을 쓰게 됩니다. 

이후 김창수는 지방을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잠시 하게 되는데요. 이때 원종(圓宗)이라는 이름을 받아 생활합니다. 이는 은사인 하은당 

스님이 지어주신 법명이라고 하네요.  


#4 승려 생활을 마친 후 다시 가명을 쓰다




이후 약 1년여 간의 승려생활을 마친 김창수는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감옥시절 자신을 도와줬던 김주경의 소식을 듣고 
그가 있다는 강화로 갑니다. 그때도 그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여야 했는데요. 이를 위해 김두래(金斗來)라는 가명을 짓고 강화로 떠납니다. 

#5 25세, 처음으로 김구(金龜)라는 이름을 쓰다



강화에서 만난 김주경의 친구 유완목은 김창수의 이름이 쓰기가 매우 불편하다며 다른 이름을 권유합니다. 그 이름이 바로 김구(金龜) 입니다. 
당시 그의 나의 25세였죠. 김구의 구는 거북이 구(龜)자를 쓰고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를 썼는데요. 이 김구라는 이름의 의미는 나중에 또 
한번 바뀌게 됩니다. 

#6 감형으로 다시 세상에 나온 김구, 이름의 뜻을 김구(金九)로 바꾸다



안악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던 김구는 일왕 및 일왕 왕비의 사망으로 형량이 감형돼 다시 세상에 나옵니다. 이때 김구는 스스로 자신 이름의 뜻을 
아홉 구를 써 김구(金九)로 바꿉니다. 동시에 호 역시 백범(白凡)으로 바꾸는데요. 이는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나라가 독립하려면, 천한 
백정이나 무식한 범부(올바른 이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나만큼의 애국심은 가져야 하며, 나부터 그 길에 앞장서겠다"는 각오를 다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7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어진 김구의 이름 변천사



이후 상해로 넘어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친 김구. 일제는 김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요. 특히 이봉창, 윤봉길 의거 이후 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을 정도였죠. 이에 김구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 외가 쪽 성씨를 따 성을 장(張)씨로 바꾸고, 이름은 
진구(震球) 혹은 진(震)으로 고쳐 장진구, 장진의 이름으로 절강성 가흥에서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 김구는 중국 남부 광동인으로 행세함은 
물론, 반벙어리 시늉까지 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게 일제의 추적을 따돌렸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8 1938년 다시 찾은 이름 ‘백범 김구’



늘 일제를 피해 몸과 이름을 숨겨왔던 김구는 1938년, 당시 그의 나이 6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백범 김구로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활동합니다. 
이후에는 쭉 그 이름을 사용하죠. 

한편 백범이란 호는 그가 평소 젊은이들에게 힘주어 말했던 ‘쟁족(爭足)’이란 단어와 맥이 닿아 있었다고 하는데요. 쟁족이란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 
싸우지 말고 발이 되려고 애쓰라는 뜻으로 이는 곧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 고된 일을 자청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된 일을 자청하고 이름을 여러 번 바꾸며 살아야 했던 김구. 그가 보여준 나라를 향한 사랑과 희생을 감사히 여기고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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