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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 유관순은 민족통합의 아이콘이었다?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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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시작은 민족통합의 아이콘?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유관순. 이처럼 3·1운동 운동을 상징하는 유관순의 시작은 민족통합의 아이콘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2 유관순이 세상의 주목 받게 된 것은 해방 직후였다




유관순이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였습니다. 1946년 가을 미군정하 문교부에서 국어 교과서 집필을 전영택은 ‘한국의 잔 다르크’를 

찾고 있었는데요. 그의 눈에 띈 사람이 바로 유관순이었죠. 


#3 박계주의 소설 <순국의 처녀>, 유관순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다




이후 유관순의 이름은 1947년 2월 28일 자 〈경향신문〉에 소설가 박계주가 쓴 ‘순국의 처녀’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그녀가 다녔던 

이화여자중학교 교장 신봉선과 교감 서명학이 주도해 유관순기념사업회가 발족되고, 기념비가 건립되었죠. 


#4 연극, 영화, 교과서에까지 나온 유관순




이후에도 유관순을 알리는 작업은 꾸준히 이어졌는데요. 전영택은 유관순 전기인 유관순전을 발간했고, 윤봉춘 감독은 영화 유관순을 만들어 개봉합니다. 

또 연극 ‘순국처녀 유관순 혈투기’가 무대에 올랐고요. 나아가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박계주가 쓴 ‘순국의 처녀’가 실렸을 정도니 명실상부 3·1절의 

아이콘이 된 것이죠.


#5 사실은 말이야 …




그런데 이렇게 유관순이 대중적인 주목을 크게 받게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유관순을 이처럼 돋보이게 한 이유는 당시 곳곳에서 분열되고 

있는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 이었습니다. 


#6 남과 북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되고 있던 대한민국




실제 그 당시 대한민국은 38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갈리고, 정치적으로는 좌익과 우익, 중도 등으로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해방을 맞아 1946년과 

1947년에 열린 삼일절 기념식은 좌우가 각각 개최했고, 유혈충돌을 벌였고, 특히 1947년에는 16명이 죽기까지 했을 정도였죠.


#7 민족통합을 염원했던 이들 유관순으로 뭉치다




이에 온 민족이 함께 항일독립을 외친 3.1운동을 기념하면서 오히려 정치 갈등이 격화되는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경은 복잡함 그 자체였는데요. 

민족통합을 염원했던 이들은 여학생으로서, 또 신여성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유관순을 민족의 이름으로 함께 기리면서 갈등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유관순을 널리 알렸다고 합니다. 


실제 유관순 영화를 제작한 방의석은 이 영화를 통해 “다같이 반성하고 참회해서 선열과 애국지사의 뜻을 받들어 삼팔선을 우리의 손으로 부수고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서 한데 뭉치자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하죠.


#8 평화의 번영의 길을 앞둔 지금 ‘유관순’의 바통을 이을 새로운 아이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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