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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 320억의 사나이 ‘약산 김원봉’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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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조명되고 있는 ‘약산 김원봉’




영화 ‘암살’, ‘밀정’ 등으로 재조명 된 ‘약산 김원봉’. 최근에는 김원봉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이몽’의 제작 소식이 들리며 다시금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데요. 

약산 김원봉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2 일제시대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사나이 




김원봉은 일제시대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김원봉에게 10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하는데요. 이는 현재 가치로 따지면 

320억 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일제가 치열하게 잡고 싶어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현상이 60만 원(현재 가지 200억 원)이었던 것과 비교해도 큰 차이죠. 


#3 독립의식이 투철했던 어린 김원봉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어릴 적부터 독립의식이 투철했다고 하는데요. 그 정신을 알 수 있는 사건으로는 밀양공립보통학교 시절의 일장기

변소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 천왕 생일을 맞아 일장기를 게양하려고 했는데요. 김원봉은 동창들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버려버리죠.

이 사건 이후 김원봉은 바로 퇴교를 당하고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떠납니다. 


#4 불과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의 단장이 되다




김원봉은 일제를 향한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분명히 하였는데요. 1919년 윤세주, 이성우 등의 동지들과 의열단을 만들고 단장이 됩니다. 그의 나이 

21살에 불과했을 때죠. 의열단은 일제 요인 및 친일파 거두를 암살하는 7가살과 동양척식회사, 부산 경찰서 등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는 5파괴를 정하고 

이를 행하는 것에 중점을 둔 독립단체였는데요. 일제는 그 중심이었던 단장 김원봉을 상당히 두려워하며, “대적할 자가 없는 기백과 신출귀몰하는 

특기를 가졌다”고 묘사했다고 하죠. 


#5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 양대 축으로 부상하다




김원봉은 의열단 외에도 조선의용대(1938년)을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1944년)을 지내는 등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양대 

축으로 활동을 했는데요. 실제 김원봉이 임시정부 및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합작 진행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백범과 약산 두 거목이 드디어 손을 

맞잡았다고 기뻐했다고 하네요. 


#6 해방 후 조국에서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치욕을 당하다




김원봉은 해방 후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습니다만, 조국에서 일제시대 악질 친일 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체포당하고 뺨을 맞는 

치욕을 맞이합니다. 당시 김원봉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제와 싸울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손에 이런 모욕과 

치욕을 당하다니 이럴 수가 있나”라며 사흘을 꼬박 울었다고 하는데요. 이는 향후 김원봉이 북으로 올라가 노선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죠. 


#7 북으로 넘어간 김원봉,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이는 당시 반으로 갈린 남한의 국내 정세가 친일 청산보다 반공에 더욱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악질 친일 경찰이던 노덕술이 김원봉에게 치욕을 

준 것도 해방 후 반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과거 친일행적을 세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환멸을 느낀 김원봉은 결국 북으로 넘어가게 되죠. 이러한 

이유가 그 동안 김원봉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8 다시 기억해야 할 그의 이야기는?



앞서 말했듯이 김원봉은 최근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재조명 받고 있는데요. 일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다시 기억해야 할 

그의 이야기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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