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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터즈 ]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 선생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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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10월 6일 천안 목천 동리에서 태어난 이동녕 선생이 천안시에서 올해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목천 동리에는 이동녕 생가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동녕 생가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2호입니다. 천안은 석오뿐 아니라 유관순 열사 등 많은 애국열사가 태어난 충절의 고장입니다.

석오이동녕기념관


석오이동녕생가



석오는 의성 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에 천자문을 익히는 등 매우 총명하였고, 인품도 자애로웠다고 합니다.



석오는 청소년기에 부친이 경상북도 영해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지내면서 출세니 양반이니 하는 특권의식을 거부하고 민중과 함께 하는 생활이 인간다운 생활이라 생각하면서 개화 의식에 스스로 눈을 떴다고 합니다.



1894년 석오는 풍산 김 씨 김경선과 혼인 후 1890년대 후반부터 구국 운동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이종일과 함께 제국신문을 발간하고 학교를 세워 계몽과 인재 양성에 힘을 쓰고자 했습니다.



석오의 첫 교육기관 '상동청년회'는 초기에는 신앙 단체에 가까웠지만 1900년대 대표적 항일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인 전덕기가 전도사로 와 1903년 상동청년회를 재건하고 정치활동과 구국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석오는 상동청년회에서 공옥학교와 상동청년학원 설립에 참여하였는데요, 공옥학교는 초등 교육기관으로 1896년 설립하여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1905년 정식 개학한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에서도 국사, 외국어 교육, 군사훈련 및 신문화 수용과 전파 등을 담당했고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후 상동청년회는 일제의 강한 항의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운 선교사들에 의해 1906년 해산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두 번째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습니다.

서전서숙은 1906년 10월 이상설과 함께 만주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으로 북간도 용정에 세워졌습니다. 일제에 농토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새로운 생활근거지가 되었습니다.



서전서숙이 문을 닫은 후 석오는 신민회 활동에 참여해 교육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신민회는 1911년까지 오산학교와 대성학교 등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벌였습니다. 1910년 12월 신민회 회원들은 서간도로 이주하여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 설립을 추진하고 석오는 군중대회 임시의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1911년과 1912년 대흉년으로 한인사회가 경학사를 유지하지 못하고 1년여 만에 해산되었습니다.

석오가 신민회 회원들과 서간도로 떠난 이유는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는데요, 1911년 자치기 관인 경학사 조직 뒤 삼원포 추가가에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세웠습니다.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확대 재편되게 됩니다.

신흥(新興)이라는 명칭은 신민회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신' 자와 다시 성대하게 일어나는 독립운동 기구라는 의미의 '흥'이 결합되어 만들어집니다. 단속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신흥강습소 또는 신흥중학교라고도 불렸습니다.

그의 나이 42세에 풍부한 교육 경험을 갖고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신흥강습소에서 실시한 무관 교육은 육군무관학교 체제를 따랐다고 합니다.

개교 초 농사의 흉작으로 재정난에 봉착한 신흥강습소가 신민회에서 보내오기로 한 자금도 일제의 조작에 의해 오지 못해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1912년에 한인 자치단체인 부민단을 결성하고 독립군 양성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1912년 7월 부민단이 있는 통화현 합니하로 본교를 옮겨 무관학교를 신축하고 거주지도 옮기게 됩니다.

재정이 어려웠지만 1912년 7월 새롭게 신축해 낙성식을 가졌고, 무관학교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에 한 단계 더 다가가는 도약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1919년 4월 한족회가 설립되면서 다수의 청장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키로 결정하고 이에 명칭도 신흥무관학교로 하고, 본교 소재지도 유하현 고산자 하동의 대두자로 옮기게 됩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가 될 때까지 약 3500명의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 성과인 청산리대첩에도 대거 참전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장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독립의 기대에 부풀어 평화와 자유를 애호하는 전 세계 민족 앞에 호소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3.1 혁면에 영향을 준 독립선언서입니다.

한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고 민주의 자립국 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한일 합병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사기외 강박 그리고 무력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병합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데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이란 건원하고, 관제를 의결하고 나서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

제 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를 통치함.

제 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

제 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 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유한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

제 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음.

제 7조 대한민국의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 연맹에 가입함.

제 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제 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함.

제 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

임정 초기 불미스러운 시비에도 이동녕은 '우리가 살길은 오직 대동단결하는 지혜를 발휘함에 있소'라는 호소력 있는 주장을 하여 동지 선후배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후 1935년 11월 항주에서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노익장을 과시하며 통일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임정의 국무총리, 주석 등을 역임하던 석오는 1940년 3월 13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지병인 폐렴으로 순국하게 됩니다. 석오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김구의 주선으로 석오의 유해가 고국으로 환국 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게 됩니다.



석오이동녕 생가

석오이동녕 기념관에는 자주 인용했던 '산류천석'이라고 쓴 친필 휘호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산류천석은 '산에서 흐르는 물은 바위를 뚫는다'라는 뜻입니다.



산류천석 휘호석

[출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 선생 |작성자 황인아
https://blog.naver.com/inalikes/221469930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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