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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8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중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탐방 - 상해, 항주, 중경
안녕하세요. 작가 김재원입니다. 올해는 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인데요.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위원회" 주관·주최로 중국 임시정부 역사탐방을 다녀왔답니다.
당시 임시정부가 상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계속 피난을 다녀야만 했습니다.
상해부터 중경까지 계속해서 피난을 다녔습니다.
이번 탐방은 기간이 짧아 전체를 다 가보지는 못했고요.
대한민국이 태어난 상해,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가 머물렀던 가흥과 임시정부가 이전한 항주, 마지막으로 이전한 중경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들이 살았던 기강을 탐방했습니다. 2019년 3월 18일(월)~23(토), 총 5박 6일의 일정입니다.
저는 백범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와 함께 했습니다. 현장에서 <백범일지>를 읽으니 더 생생하게 와닿았습니다.
책과 함께한 임시정부 탐방~ 포스팅 시작합니다!
DAY 1
상해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청사 - 영경방 - 팔선교기독청년회관 - 노신공원(홍구공원, 매헌 윤봉길의사) - 황포탄 의거지
01 상해 임시정부청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한 청사입니다. 상해는 프랑스 조계지여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지향하는 자유·평등을 상하이에서도 그대로 실현했기 때문이죠. 윤봉길 의사의 의거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여기에서 뜻을 펼치게 됩니다. 내부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을 찍지는 못했는데요. 총 3층 건물인데 1층과 2층은 집무실, 3층은 침실로 쓰였습니다.
1919년 2월(음) 상해에 도착한 백범은 이동녕 선생을 찾아갔고,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국무회의 논의끝에 경무국장으로 임명을 했고 5년 동안 경무국장으로 근무합니다. 그의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302p).
02 영경방
영경방 10호 2층은 상해시기 김구 일가가 거주했던 곳입니다. 여기도 외관만 볼 수 있습니다. 모친 곽낙원, 아내 최준례, 그리고 두 아들 김인, 김신과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최준례 여사는 출산후 낙상사고로 늑막염이 발생해 1924년 타계합니다. 1925년 나석주가 아내를 잃은 김구를 위해 의복을 저당잡혀 김구의 생일상을 차린 곳이기도 합니다. 김구는 이것이 죄스러워 죽는 날까지 생일을 지내지 않기로 결심하고 <백범일지>에도 자신의 생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03 팔선교 기독청년회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억하시나요? 그 일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민족이 독립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윤봉길 의사가 물통형 폭탄을 던진 장소는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 지금은 노신공원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거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곳은 김구와 윤봉길이 식사를 하며 거사를 논의했던 장소입니다.
04 노신공원(홍커우 공원)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거사를 시작하는 아침 7시. 윤봉길과 백범 김구의 대화)
노신공원은 중국 아줌마 아저씨가 배드민턴도 하고, 카드 게임도 즐기는 아름다운 공원입니다. 안쪽에 윤봉길 의사의 매헌 기념관이 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가 3월이라 윤봉길 의사의 영혼이 담긴 듯한 매화가 예쁘게 피어있었습니다. 1932년 1월 일본과 중국 사이 상해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은 중국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4월 일왕의 생일과 승전을 축하하는 기념식을 이곳 상해 중심인 홍커우 공원에서 진행합니다. 중국인들에게도 엄청난 치욕을 줬겠지요? 그런데 중국 사람도 하지 못한 일. 바로 윤봉길 의사가 물통형 폭탄을 던져 일제 군부와 주요 핵심 인물 7명을 처단합니다. 이 사건으로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시 보게 되고, 지원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획한 김구는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더 이상 상하이에 있지 못하고 피난가게 되고, 윤봉길 의사는 일제에 붙잡혀 12월 19일 순국하였습니다. 매헌 윤봉길을 기리는 정자와 기념비가 1994년 설립되었습니다.
DAY 2
가흥 피난처
만국공묘 - 가흥 피난처 - 임시 정부 요인 거주지
01 만국공묘
만국공묘는 외국인 공동묘지이며, 손문의 부인이며 장개석 부인의 언니인 송경령이 묻혀있습니다. 송경령은 국민당인 장개석이 아니라 공산당과 보조를 맞췄으며 공산당 정권 수립후 부주석을 맡기도 했습니다. 중국 현대사에서 위치도 꽤 대단합니다. 그녀의 부모님이 여기에 묻혀 있기에 그녀도 만국공묘에 묻히길 원했고, 그녀가 묻힌 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따 송경령 능원이라 부릅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안태국, 신규식, 김인전, 박은식, 노백린의 비석이 있습니다. 특이했던 점은 그 나라 언어로 이름이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왠지 존중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02 가흥 피난처
상해를 빠져나온 김구는 가흥으로 피신했습니다. 지역 명사인 저보성의 도움으로 매만가 76호에 머뭅니다. 집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호수가 나오는데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백범일지에 "그 집은 호수 주변에 정교하게 지은 반양식으로, 수륜사창과 서로 마주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풍경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범이 말한 것처럼 가흥에서는 중국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토지는 비옥하여 각종 물산이 풍부하며 인심과 풍속이 상해와는 딴 세상이었다.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가게에 고객이 무슨 물건을 놓고 잊어버린 채 갔다가 며칠 후 찾으러 오면 잘 보관하였다가 공손히 내어주는 것은, 상해에서 보기 힘든 아름다운 풍습이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흥이 무척 맘에 들었습니다.
가흥의 아름다운 풍경. 이 곳에서 백범은 지친 몸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었을 것 같다.
가흥에서 도움을 준 저보성 일가와 백범, 그리고 임정 가족들
03 임시 정부 요인 거주지
매만가 76호 김구 피난처 근처에 이동녕 등 임시 정부 요인들이 거주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전을 위해 어디에 머무는 지 서로 몰랐다고 합니다. 거리로는 300m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인데 말이죠. 1층은 회의실, 2층은 숙소로 썼습니다. 1층 회의실은 전시실이 되어 당시 모습을 잘 재현해놓았습니다.
DAY 3
항주 임시정부
항주 임시정부청사(호변촌) - 한국독립당사무소터(사흠방) - 임정 가족 거주지(오복리) - 군영반점(청태제2여사)
01 항주 임시정부청사(호변촌)
임시정부가 항주에 머물던 시기는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3년 반 정도입니다. 항주 임시정부 유적 가운데 옛 모습이 잘 남아 있고 또 비교적 오래 머물렀던 곳이 호변촌 23호인데요, 잘 정비되어 2007년 11월에 정식 개관했고 2012년에 다시 정비되어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근처에 아름다운 호수 서호가 있어 당시 임정요인들이 업무를 보다 머리를 식힐 겸 서호를 걷지 않았을 까 상상했습니다.
02 한국독립당사무소터(사흠방)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상해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조직을 참고해 이사장이 주도하는 집단 지도체제를 채택했습니다. 이념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했습니다. "민중을 우롱하는 자본주의의 데모크라시도 아니며, 무산자독재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데모크라시도 아닌, 모든 한민족을 지반으로 하고 모든 한국 국민을 단위로 한 전민적 데모크라시"에서 볼 수 있듯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민족단결을 목표로 삼았습니다.(출처 :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154p)
03 임정 가족 거주지(오복리)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이 처음에 임시정부청사에서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호변촌 청사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 1934년 11월 오복리 2가 2호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1935년 11월까지 생활하다가 임시정부가 진강으로 이전할 때 함께 이동했습니다.
04 군영반점(청태제2여사)
임시정부가 항주에 처음와서 청사로 쓴 곳입니다. 당시 군무장 김철의 숙소였는데요, 이 곳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열고 활동 계획과 각 부서의 직무를 조정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드나들어 누가 밀정인지 분별이 되지 않기에 호변촌으로 옮겼습니다.
DAY 4
중경 임시정부
중경 임시정부청사(연화지) - 화상산 한인묘지 옛터 - 한국광복군 제1지대구지
01 중경 임시정부청사(연화지)
“내가 중경에 처음 도착하여 추진한 일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차량을 얻고
이사 비용을 마련하여 유주로 보내는 일이고,
둘째는 미주·하와이의 각 단체에 임시정부와 직원 가족을
중경으로 이주시킨 것을 통지하고 원조를 요청하는 일이고,
셋째는 각 단체의 통일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백범일지(377p) 중에서
백범은 통일문제로 민족주의 단일당 결성을 주장하였는데요, 다들 찬성하였으나 미주·하와이에서 "통일은 찬성하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요.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 우리 미국 교포와는 인연이 끊어지는 줄 알고 통일운동을 하시오."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김구와 약산 김원봉은 1939년 5월 공동 발표를 합니다. 이 발표의 제목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고함」 이었는데요. 자주독립의 민주공화제 수립, 기업의 국유화, 토지국유제, 토지의 농민 분배와 매매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02 화상산 한인묘지 옛터
중경에 도착한 당시 백범의 어머니께서는 점점 병이 위독해져갔습니다. 대한민국 21년(1939) 4월 26일 돌아가십니다. 화상산 공동묘지에 묻는데요. 바로 이 장소입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있고, 저 멀리에는 도로가 났습니다. 개발이 되어 이 곳이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비석이라도 세울 수 있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03 한국광복군 제1지대구지
중경에 와서 백범은 장개석 장군에게 광복군 결성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허락한다는 회신을 받습니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 여사의 부녀위로총회에서 중국돈 10만 원을 특별위로금으로 원조받기도 하였습니다. 총사령부를 중경에 설치하고 1제대장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를 임명하였습니다. 제2지대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로 미국 전략사무국 싸전트 박사와 합작하여 서안에서 비밀훈련을 합니다. 폭파술, 사격술, 비밀도강술 등 미국 교관의 훈련을 받으며 다시 대한민국을 되찾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왜적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훈련받았던 우리 군과 미국과의 합동 작전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군이 먼저 침입했을 때 일본이 항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타임머신이 있다면 다시 이 날로 돌아가 더 빨리 우리 군을 국내로 침투시키고 싶습니다.
DAY 5
기강
기강박물관 - 이동녕 선생님 거주지 - 한인거주옛터
01 기강박물관
기강은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들이 유주를 떠나 도착한 곳입니다. 기강에 도착한 후로 임정 가족들은 한숨을 돌립니다. 중경에서 버스로 2시간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기강. 기강박물관 3층에 우리 임시정부 기록이 있어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공사를 하고 있다고 하여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중국 박물관에 우리나라 임시정부 유물과 기록이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곳을 찾는 한국인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02 이동녕 선생님 거주지
높은 아파트 사이 낡은 주택. 이 곳은 임시정부의 어른, 이동녕 선생님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이 낡고 작은 집에서 이동녕은 7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백범은 이동녕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라고 하였습니다. 몇 줄 안되는 백범의 글에 이동녕 선생의 인생 전체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03 한인거주옛터
백범이 중경에 도착한 이후 중국의 전시구호기관인 진제위원회에 교섭하여 토교 동감 폭포 위쪽의 한 구역을 매입한 후 기와집 3동을 건축하였고, 도로변에 2층 기와집 1동을 매입하여 100여 식구의 머물 곳을 정해 주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한 정정화의 <장강일기>에 의하면 이 곳에 와서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이 맑아 빨래도 하고 미역도 감을 수 있어 고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폐쇄된 공장안에 있어 매쾌한 냄새가 나고 있었고, 버려진 건물을 뚫고 찾아가서 그런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지금은 한인거주옛터라는 비석만 있었는데 근처 지역이 재개발 중이라 이 곳도 언제 없어질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423p)
그 동안 글로만 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간을 보고나니 그들이 존재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돈이 없어서 채소장수로도 일하고, 공장에서도 일해서, 임시정부를 유지시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들은 힘들게 번 돈을 임시정부에 보냈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국가란 어떤 의미입니까? 그냥 이룬 역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만든 역사입니다. 우리가 피를 흘려 만들고자 했던 것은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 정신을 계승해 촛불로 지킨 우리나라입니다. 앞으로의 100년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기 전, 우리는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발자국을 남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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