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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독립운동을 하며, 육아일기를 쓴 남자_소벽 양우조 선생님께 궁금한 게 많습니다.-이기연-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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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벽 선생님, 부인 최선화 선생님과 함께 쓰신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며, 그것도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의 피난길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공습을 피해가며, 아기를 낳고 키우고, 육아일기를 8년간이나 쓰시다니요. 두 사람이 만나 한 명도 낳지 않는 시대가 된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두 분의 삶은 역사에 기록된 독립운동의 차원을 넘어 일상적 삶의 의미와 생명의 본질까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며 아이를 넷 낳았고, 네 명의 육아일기를 조금씩 썼고, 민중미술운동을 시작하고, 그 영역을 의식주까지 넓혀 민족생활문화운동을 하고, 우리옷 입기 운동을 펼치다 질경이 우리 옷이라는 회사를 만들게 되어 그 대표를 하고 있는 이기연입니다

두 분이 쓰신 육아일기를 보며, 전 도리어 두 분에게 궁금한 게 많아졌습니다. 참 부끄럽게도 두 분과 비슷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제가 두 분을 몰랐고, 혹시나 해서 주변의 여성운동 하는 친구와 역사학자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들도 두 분을 몰랐습니다. 참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소벽 선생님, 해방 후 귀국해 양우조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선생님을 양명진·양묵·양소벽으로 심지어 1937년 결혼하실 즈음에는 중국인 이춘삼이 되기도 하셨죠. 저희 세대도 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며, 이른바 잠수하고 다니던 수배자 시절을 통해 그 상황과 심정을 공감하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신분증까지 만들어 가지신 걸 보면 현지인 만큼 중국어를 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미국 유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들어오신 게 1929.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영국령이었던 보르네오 정부와 교섭하고, 중국 정부 요인을 설득해 후원을 얻어 국내의 유망한 청년 수백 명의 중국 유학을 주선하고, 중국 광동성 정부의 건설청 공업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며 임시정부 일을 한 것이 1930, 그렇다면 1년 만에 이런 일을 도모할 만큼의 중국어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위기가, 의무감이 선생님을 그리 만들었나요? 과연 그 힘은 무엇일까,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계산기를 두들겨 가며 선생님의 기록 몇 장을 따라가 봅니다. “1897년생, 1915(18세 때) 친구 세 명과 상해로 감. 상해 교포사회에서 미국행 배편과 미국교포의 주소를 얻어, 단신으로 미국으로 감.” ‘단신으로 미국에? 주소 하나 밖에 가진 것이 없는데, 무얼 믿고? 교포사회의 누가 18세의 선생님에게 무슨 이유로 미국행을 주선했나요?

기록에는 선생님이 더 큰 세계를 보겠다는 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그럼 같이 간 세 친구들은요? 혹시 기독교의 후원이나 믿음이 있으셨나요? 선생님의 청소년기가 많이 궁금했습니다. 어떤 부모님, 어떤 환경에서 자라셨는지. 그 무모함과 돌파력은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의지대로 선생님은 1916(19) 미국에 도착해 혈혈단신으로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10년만인 1926MIT공대를 거쳐 메사추세츠 뉴벳포트공과대학, 28년 폴리버공과대학을 졸업하셨고, 개교 이후 최초의 동양인 졸업생에다가 우등졸업생까지 되셨습니다. 영어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가 미국인도 20년 걸릴 일을 10년 만에 해치우신 건가요? 말도 못하고 돈도 없는 혈혈단신 이국 청년이 항구에서, 탄광에서, 사탕수수밭에서 몸을 다쳐가며 일해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가면서 말입니다.

선생님이 공대를 가고, ‘방직 공학을 전공하시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이기도 했지요. 한국을 다녀온 미국인 선교사에게 비참한 조국의 얘기를 듣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으신 게지요. 동포들이 가난하고 헐벗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갔기에 선생님의 인생을 방직 공학으로 향하게 했을까요?

해방 이후에도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한겨울에 삼베옷 겹쳐 입고 떠는 사람을 보았다는 얘길 민주화운동 원로분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밥은 굶어도, 물만 먹으면 얼마간 견딜 수 있지만, 옷은 못 입으면 바로 죽을 수 있지요.

지난 겨울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뤼순 감옥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들은 얘기입니다. 노역을 나가고 들어올 때 반드시 검신을 했답니다. 그때 옷을 다 벗고 출입구에 걸쳐놓은 봉을 뛰어넘어야 한다는데, 추울 땐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얼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검신대와 옷이 그대로 재현되어 걸려있었습니다.

그래서 --라고 하는 나라도 있는데 우리는 굳이 --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 때문에 겨울도 그리 춥지 않지만 제 어릴 적, 60년대만 해도 겨울이면 영하 20도가 넘어갔고, 손등이 터지고 동상이 걸리고 했으니, 일제강점기야 오죽했겠습니까.

나아가 옷은 한 민족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일제는 우리에게 흰옷을 못 입게 했지요. 흰옷 입은 사람은 관공서 출입을 못하게 하고, 검은 물감을 뒤집어씌우기도 했고, ‘색복 입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 동학 농민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서면 흰옷 입은 사람의 무리가 보이니 흰산 같고, 앉으면 죽창이 보이니 대나무산 같다는 게지요.

선생님이 뜻대로 방직공업을 제대로 일으키셨다면 과연 그 후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국의 산업혁명이 방직공업에서 일어났고, 프랑스 파리가 전 세계 패션의 중심이 된 것도 방직공업의 발달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 통에 옷감과 군복의 생산력이 늘어나 있으니,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소비처가 필요해지지요. 전쟁 산업에서 평화산업으로 탈바꿈하는 그 어디쯤에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의 전환이 있고, 그 결과 패션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새로이 대두되고 각광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상상과 달리 초기의 명품 디자이너들은 패션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파리를 대표하는 샤넬은 무학의 가난하고 불우한 모자 보조 봉제사였고, 전후 패션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평가되는 크리스챤 디올은 외교관 지망생으로 미술품 중개를 하던 사람이고, 이태리의 죠지 알마니는 의대생이었습니다. 버버리는 대영제국 군대에 군복을 납품했고, 휴고보스는 히틀러 군대에 군복을 납품했습니다.

대량생산 되는 원단에 맞는 디자인을 하고, 그것이 영화로 유행하고, 새로운 수요와 유행이 발생하고, 전문기술과 디자인을 가르칠 학교가 생기고, 전 세계에서 그 학교로 유학을 가고 유행을 선도할 잡지가 생기고, 관심을 끌 이벤트로써 패션쇼와 전 세계 장사꾼들을 모으는 패션 전시회가 생기고, 그것이 모두 전후 자본이 모이는 구조가 되는 것이죠.

소벽 선생님, 선생님은 과연 어디까지 시대를 읽으신 겁니까? 과연 어디까지 산업적 접근을 하신 겁니까? 헐벗은 내 민족을 돕는 자선사업가나 종교지도자, 정치운동가가 되지 않고, 왜 방직공업을 전공하셨는지, 유럽에서도 이런 변화가 2차대전이 끝나서야 가시화되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1920년대 초반에 거의 20여 년을 앞서 이런 생각을 하고 결단을 하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더구나 예사롭지 않은 건 그런 계획을 혼자서 수립한 게 아니라, ‘재미한국 학생회흥사단동료들과 의논을 거듭한 끝에 역할분담을 하고 한국에서의 실천계획까지 짰다는 것이지요. 방직공업도 세분해서, 면방직, 마방직, 공장가동을 위한 전기학, 직원 자녀들 교육을 위한 교육학까지 생각하셨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준비를 위해 무역업을 해서 큰돈을 벌어 조국으로 들어오셨지요. 그러나 공장부지를 찾기 위해 전국에 인맥을 동원해 조사를 한 것이,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을 하러 왔다는 의심을 사 감시를 받게 되셨다지요. 그 과정에서 선생님은 독립을 하기 전에는 산업을 일으킬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하시게 된 겁니까?

혹시 흥사단 활동을 하시며 이런 꿈을 꾸신 건 아닙니까? ‘전문성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의 장을 열고, 기업 운영을 통해 지속적이고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직원 자녀교육으로 시작해 민족독립 교육까지 이루는 것, 혹시 식민지를 운영하는 그들보다 출중하면 독자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 어려운 시절, 모국어를 쓰는 우수한 미국 사람보다도 더 빨리, 미국의 명문대를 그것도 3개씩이나 섭렵한 선생님의 행적은 사실,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으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꿈을 꾸며 조국에 돌아왔는데 부산지역에 감금당하고 10여 년 준비한 꿈이 일제에 의해 짓밟힌다는 절망 때문에 장티푸스를 앓으신 건 아닌지요. 그래서 장티푸스를 이겨내자, 곧바로 상하이로 떠나 임정을 통한 독립운동에 투신하시게 된 건 아닌지요. 그때가 1929, 선생님이 32세가 되셨던 때입니다.

그리곤 곧바로 재상해 한국독립당창당발기인이 되셨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또 재무부 화남 특파원으로 임시정부의 자금을 모으고,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들을 맡아 하십니다. 그리고 화남지역 한국유학생회 지도고문으로 임명되시고 혁신사란 출판사를 설립해 <민족주의와 기타주의>, <삼민주의>, <손문학설> 등을 번역?출판하고 월간지 <한성(韓聲)>을 발행했는데 국내 배포경로가 일경에 발각되어 본국에서 한글 활자를 구해 보내던 조카와 친형제가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중반에도 불심검문해 인물 한 장이라도 발견되면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에 제작배포라니, 배후를 캐기 위해 일경이 선생님 가족을 얼마나 고문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1980년대에도 노동자 신문에 삽화를 그렸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40년 뒤인 지금은 가짜뉴스가 온갖 해악을 일으키는 데도 통제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93640세 되던 해, 소벽 선생님은 26살의 최선화 선생님과 혼인을 하십니다. 그녀는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사를 하던 신여성이었습니다. 선배의 소개로 서울에서 잠깐 본 이후 소벽 선생님과 편지로 사귀다가 혼인까지 결심하게 된 것이지요, 14살 많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동경제대를 나온 수재였다는 최선화 선생님의 아버님은 중국까지 사윗감을 보러 가셨고, 일경을 피해 다니는 사윗감을 보고, ‘애국청년이라 믿음직스럽다며 혼인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 멋지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셨던 그 판단의 가치는 두 분이 그 뒤에 깊고 긴 강처럼 흐르는 일상을 어떻게 살아내셨는가에 달려있고, 그것을 엿볼 수 있는 게 바로 <제시의 일기>라 생각됩니다.

두 분은 김구 선생님의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셨고, 소벽 선생님은 연미복에 나비넥타이, 최선화 선생님은 장식 없는 하얀 웨딩드레스에 아주 긴 면사포, 한 다발의 부케를 드셨습니다. 조촐하지만 정성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청첩장은 영어와 한문으로 작성되어 유학생다운 국제적 면모가 느껴집니다.

저도 최선화 선생님과 같은 나이, 26살에 혼인을 했습니다. 제 주변에선 제가 제일 빨랐습니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권은 거의 모두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거리에서는 수시로 불심검문이 행해지고 수배자 명단은 전국에 뿌려졌습니다. 감춰준 사람들도 끌려가서 매 맞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게 불과 40여 년 전 일입니다. 19816월쯤 되자 수배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제겐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갔던 한 남자가 수배가 풀리니 도리어 갈 곳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돌아갈 집이 없는 남자였습니다. 후배들과 새로운 미술 운동을 준비하던 저는, 순서를 바꾸어 먼저 결혼부터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남자와는 같은 길을 가니 결혼을 언제 하는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여겼지요.

우리는 전통 혼례를 재해석해 새로운 혼례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바느질 집에 가서 한복을 한 벌씩 맞추어 입고, 북한산 중턱 넓은 공터를 무료로 빌렸습니다. 결혼식 날 산 밑에는 닭장차(시위진압에 동원된 전경들이 탄 버스)’ 2대와 전경들이 깔렸습니다. 노조 풍물패들이 산 밑에서부터 풍물을 치고 올라오고, 요주의 인물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위장 결혼식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합니다. 식이 끝나자 가마솥 걸어놓고 국수 삶아 먹으며 막걸리 한잔에 모두 춤추고 노래하고 놀았습니다.


그 후 이 혼례 양식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저는 절·교회·성당 등에서 혼인 못하고 사는 노동자들의 혼례식을 이렇게 매주 집전했습니다.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비 오는 혼례식 날에는 혼례 끝나고 짜장면을 시켜 먹는 기억도 나고, 제 아들이 화동(花童)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소벽 양우조·최선화 두 분 선생님은 임시정부 내에서도 보기 드문 지식인 부부셨고, 결혼을 계기로 최 선생님은 교사에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애국부인회 준비위원으로 총무로 활동을 시작하셨고, 임시정부의 가족이 되셨습니다.


제시가 3살 무렵이던 어느 여름날 일기입니다. 제시가 학질에 걸려 앓고 있었는데, 소벽 선생님이 약을 사다 다려서 아이를 달래가며 먹이고 계셨습니다. 왜일까? ‘엄마는 애국부인회 조직을 위한 준비 회의에 분주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벽 선생님, 저는 <제시의 일기>에서 이날이 제일 인상에 남습니다. 임시정부 중요 활동가인 재무부 차장께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또 임시정부에 아동 주일이 있고, 그날이 되면, 임시정부의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과자값을 따로 챙겨준다는 것도 참 놀라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 제니가 태어날 때, 시계를 들고 초조하게 시간을 재던 조소앙 선생님, 장차 나라를 구할 인재가 태어나기를 기다리시던 김구 선생님, 사주 보고 좋아하시다 딸이라니 실망하시던 원로 선생님들, 그 모든 것이 가부장제나 아들 선호로 느껴지기보다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아픈 아이를 돌보며 어린 아내를 내보낼 수 있는 소벽 선생님의 원칙 같은 게 그곳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소고기 한 근이 4원인데 20원을 주고 제시 자매의 사진을 찍고, 고난의 피난길 중에도 아이의 옷을 만들고, 뜨개질을 하는 모습, 그런 것들이 좀 낯설다가도 어쩌면 삶의 여유와 품위를 유지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소벽 선생님, 193874일 시작된 <제시의 일기>1946429, 8년 만에 이렇게 끝내시는군요.

과거의 조국을 찾기 위한 투쟁이 아닌 새로운 조국을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 구절이 참 슬프게 마음에 울립니다. 선생님이 분단된 조국에서 느끼셨을 그 모든 낯선 감정들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 늘 가슴에 품고 있겠습니다.

소벽 선생님,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고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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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우조(楊宇朝, 1897~1964)

만 스물이 되기도 전에 독립전선에 가담하러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교포사회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귀국해 민족의 입을꺼리를 책임질 방직공업을 일으키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망명해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실업계에서 활동했다. 호는 소벽(少碧).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화여전을 나와 안정이 보장된 삶을 뿌리치고 14년 연상의 소벽과 결혼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온 최선화와 결혼,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했다. 이 부부가 남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는 조국애와 부부애 그리고 부성과 모성이 합체된 감동의 가족드라마인 동시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기 연

()질경이우리옷 대표이자 생활문화원 무봉헌주인이다. 미술과 민주화운동, 우리옷과 민족전통을 하나로 잇는 일에 40년 넘게 매달리고, 여성독립군을 예술로 되살리는 작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100인 위원회) 위원. 침뜸의학과 건강문화 전승을 위해 노력하는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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