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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 심옥주 기고문 - 3.1운동 100주년과 여성독립운동가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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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여성독립운동가


- 나라를 잃은 어머니와 푸른 소년의 이야기-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냉전기류가 고조되었던 한반도에서 남북교류협력이 확약되고 그  변화의 흐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행사로 집중되고 있다. 100주년,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했던 시기,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고 중국, 미국, 일본 등에서 독립운동을 여는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세대, 지역, 성별, 연령 등을 타파한 민중운동으로 전개되면서 독립이 곧 민족의 염원이고 당면한 시대의 과제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여성도 함께 외쳤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역사의 뒤 안에 있던 여성들은 독립운동의 대열에서 한 맥을 이루며 성장했다. 구국운동을 뒷바라지 했던 여성이 독립운동의 실천자로 변화하는 과정은 근대화의 조류 속에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국가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자각하는 과정이었다. 여성의병, 여성독립군, 여성광복군, 임정요원, 여성단체 활동 등으로 확산된 여성독립운동은 더 이상 사회의 울타리, 일제의 탄압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저항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 나라를 잃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성장했겠지만 그 시대 소년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의 희망을 찾아야 했고 시대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꼬박 10시간이 걸리는 LA에서 나는 안필영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도산 안창호 애국지사의 3남 2녀 중 막내인 안필영 선생님은 90세가 넘는 고령이었지만 건장한 체구에 밝은 모습이셨다. 선생님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상해 임시정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생전에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자라면서 어머니 이혜련 애국지사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훈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이혜련 여사에 대한 기억 속에 아버지의 기억을 담았다. 어머니는 늘 강건하고 엄격한 성격이었다. 3.1운동의 소식에 남편은 상해 임시정부로 떠난 뒤, 그녀는 생계를 위해 농장에서 일을 하며 그 품삯으로 아이들을 키워 나갔다. 타국에서 독립운동 소식을 들었던 한인 이민자들은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하고 받은 품삯의 일부를 독립자금으로 내놓으며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버텨냈다.

  이혜련 여사는 남편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고국의 상황을 직접 접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는 시간을 쪼개어 재봉틀을 돌리며 손수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 장에 1달러씩 판매한 수익금을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자유를 몸소 느꼈던 미국에서 한인 여성들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조국광복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혜련 여사도 낮에는 농장 일을 하며 틈나는 시간에 재봉틀을 찾았지만 함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의 각 지역에 공문을 발송하여 여성애국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호소했는데, 그 마음이 모여 ‘대한여자애국단’이 조직된 것이다.  

  이혜련 여사에 대해 안필영 선생님은 남편없이 타국의 설움을 온전히 견뎌냈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그 강인함이 무너졌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치열했던 타국의 일상에서 사춘기 소년이 집을 나가겠다고 응석을 부리자 어머니는 속앓이를 하면서도 ‘태어났을 때 빈 몸으로 왔으니 나갈 때도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집 밖을 얼마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왔던 기억에 선생은 웃음 지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엄격함이 무너지면서 아들 안필영 선생님 앞에 눈물을 쏟아낸 적이 있었다. 늦은 밤, 집안전체를 울렸던 전화벨 소리와 수화기를 든 어머니, 어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한참 뒤에 아들을 찾으며 울먹이는 소리로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겠구나...”라고 소년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전했다.

  강인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그리고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그 시대인의 이야기를 마주하며 100주년의 과제를 생각한다. ‘3.1운동,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해야 할까’ 나라를 잃었다는 것, 그것은 민족의 미래를 잃은 것과 같았다. 미래의 희망을 찾기 위해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독립을 염원했다.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희망을 쫒았던 우리 선열의 스토리는 도산 안창호 애국지사 집안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해주어야 하는 일, 지금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00주년을 기리고자 한다. 평범한 일상이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일상으로, 독립자금을 위한 치열한 생활터로, 독립을 꿈꾸며 버텼던 고난의 시간으로,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독립의 희망으로, 우리 역사가 채워지고 버텨냈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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