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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 정상규 기고문 - 청년들에게 전하는 편지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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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의병,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격변 역사. 이 역사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이러한 역사의 이름들이 상당히 평가절하되어있다는 점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동학농민운동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독립운동이라기보다 독립전쟁, 민주화운동이라기보다 민주화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


1940년대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실제로 우리는 3.1혁명이라고 불렀다. 원래대로라면 제헌 헌법 전문에도 수록될 용어였다.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시작된 비폭력 운동은 민중과 지식인의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로 발전하였고 시위의 끝이 또 다른 시작으로 각종 후원회, 시민단체, 민족교육 기관,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같은 여성단체, 의열단, 의용단, 공명단, 대진단, 태극단과 같은 민족정신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무장 레지스탕스 단체, 그리고 독립군이 탄생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의 계기가 되었다. 처음의 성격인 비폭력 ‘운동’에서 결국 역사를 뒤바꿔놓은 ‘혁명’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는 등 20세기 세계사에서도 중요히 여기는 사건이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여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집계는 이와는 다른데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의 야마 베야마베 겐 타로와겐타로와 뉴라이트의 신복룡 교수는 각각 46만 명과 5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인구수와 당시 인구수를 비례해 계산해보면 전체 인구 5명~8명 중 1명은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다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단순히 운동일 수 있겠는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된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역사적 자존감과 순국선열들의 물려주신 정신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둘째는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맥이 자유의 정신에 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나의 자식들은 신분제의 철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의병과 독립전쟁은 나의 자식들이 독립된 조국에서 자유민으로 살아가도록,

민주화 혁명은 나의 자식들이 독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공화국에서 살아가도록,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선배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투쟁의 역사였다.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다양한 방략으로 세대를 넘나들며 자유를 향한 투쟁과 쟁취의 역사, 즉 ‘리버티(liberty)’의 정신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유례가 없다.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특히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지난 100년의 역사가 어떠한 메시지를 주는지, 앞으로의 100년은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야할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한 번쯤 멈춰서 생각해볼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닐까?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간위원 정상규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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