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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가거라.
그리고 살아내거라.
설령, 우리의 땅이 붉게 물든다 하여도.
내 비록 그것을 보지 못한다 하여도.
내 뜻과 정신은 조선의 혼이 되어
이 땅에 영원히 남아 함께 하리라.
12월 18일 - 1일 차
아침 일찍 짐을 챙기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어제와 달리 오늘 아침은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중국 하얼빈은 영하 15도라는데…. 문득 난감했지만,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서 중대장 생활을 하며 보낸 겨울을 생각하니 별거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02분, 인천공항 제1 여객 터미널 탑승구역 C 국제선 팻말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며 같이 출발하는 위원회 공무원분들에게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위원회 멤버가 모두 모이고 간단한 일정 및 주의사항을 공유한 뒤 우리는 단체비자를 발급받은 사람과 개인비자를 발급받은 사람으로 나누어 짐을 부쳤다.
탑승 절차를 모두 마치고 탑승구 게이트 앞으로 도착했는데 비행기가 40분이나 지연이 되었다. 게이트 입구에서 20분, 비행기 탑승 후 또 20분.
인천공항에서 하얼빈까지는 1시간이면 간다. 하얼빈 공항에 도착한 뒤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짐에 우리는 새삼스레 대한민국 공항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번 느꼈다. 조그마한 비행기에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데 짐 기다리는 데만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하얼빈 공항 짐 찾는 곳)
이미 시간이 많이 지연된 탓에 우리는 급히 대절해온 버스에 올라타 하얼빈 시내로 향했다.
하얼빈 시내는 정말 추웠다. 서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온도였지만 참 다행이라 느낀 것은 우리가 오기 바로 전날에는 영하 25도까지 떨어졌고, 우리가 서울로 돌아가는 날부터 다시 맹추위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얼빈 공항입구)
숙소에 들려 짐을 풀기도 전 우리가 처음으로 들린 곳은 중국 하얼빈 시내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었다. 이곳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2가지였다.
첫 번째는 국민 대부분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기, 딱 그 시기의 모습만 알고 있다. 교과서와 한국사 시험, 공무원 시험에 그 부분만 나오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년시절, 10대, 20대는 어떠했는지, 어떤 친구를 만났고, 어떤 귀인을 만났으며, 무엇이 계기가 되어 그런 특별한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는 우리는 모르고 자랐다.
우리는 너무나 수동적으로 학습하는 데 익숙해져, 문제의 본질, 현상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가령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면, 어떻게 이토가 해당 열차 칸에 타고 있었는지, 총은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해야 한다. 권총으로 사람을 맞춘다는 건 실제로 어려운 일인데 사격 연습은 대체 어디서 했을까? 결국,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다 보면, 우덕순, 유동하, 최재형이라는 인물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의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잊혀져간 호국영령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질문을 던지다 보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
안양의 원태우 지사는 당시 유행하던 돌팔매질로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지나가던 열차에 던져 얼굴에 큰 상처를 입힌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보다도 4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처음에 나는 ‘이게 말이 되는가?’라는 생각을 품었다. 의구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실제 역사의 현장에 찾아가 봐야 했다.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1905년 당시 기차의 평균 운행 속도는 시속 20km였다. 더욱이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불리던 그곳은 지금과 달리 땅의 경사가 급해 달리던 열차는 속도를 더욱 줄이며 넘어가야 하는 장소였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는 ‘아시’라는 민속놀이가 있었는데, 이것은 돌을 집어 던져 누가 멀리, 누가 정확히 맞히는지 시합하는 놀이였다고 한다. 당시 일제는 의병의 소행이라는 것이 알려져 여파가 커질 것을 우려해 무지몽매한 농민이 우발적으로 행한 일이라고 기사를 냈다. 동시에 어느 일본인 화가가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에는 원태우 지사는 갓을 쓰고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농민의 모습인가?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의외로 답은 조그마한 질문을 던지면 해결이 된다.
무지몽매한 농민 개인이, 이토 히로부미가 언제 오는지, 심지어 어느 열차 칸에 정확히 타고 있는지, 아무리 민속놀이였다지만 그러한 농민이 홀로 정확하게 공격을 성사시켜 얼굴을 수십 방 꿰매야 하는 큰 상처를 입히게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역사에 기록을 남기지 못한, 어느 의병대나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는 인물이었다는 게 자연스럽다.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다.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아버지 집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결의에 찬 눈빛을 보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의 최페치카 최재형 선생의 딸 최 올가다.
"노보키에프스크(현 크라스키노)에 살 때였다. 안응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듣기로 누군가를 사살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리 집 마당 벽에 사람 셋을 그려놓고서 권총 사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 소냐 언니와 함께 마당에서 자주 보았다. 안응칠이 하얼빈으로 가서 어떤 일본 군인을 죽였다. 그래서 자기도 죽었다고 얘기 들었다. 아이들과 부인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가 음식도 주고 옷도 주고 떠날 때 보따리도 많이 주었다."-최재형 선생의 딸 최올가 여사 회고록
안중근 의사가 의거할 수 있는 총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최재형 선생이며, 이미 과거부터 러시아에서 군수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선생은 수많은 조선의 의병들에게 러시아식 무기를 제공해 의병 전쟁에서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었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 섰을 때 당대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 변호하려 노력했지만, 일제가 그것을 방해했고 안 의사는 항소하지 않고 하늘의 순리에 모든 것을 맡겼다.
또한, 당시 러시아어가 완벽하지 않았고, 인력이 부족했던 선생은 의로운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의거를 성사시켰다. 선생의 옆에는 우덕순, 유동하 선생이 함께 있었다. 하얼빈 역 전에는 차이거자우라는 열차 역이 있는데,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 있던 것처럼 똑같이 가슴속에 총을 품고 기다리고 있던 영웅이 있었다. 바로 하얼빈의거의 숨겨진 조력자였던 우덕순 선생이었다. 둘은 서로 동지였고 하얼빈 의거를 계획했다. 이토가 어떻게 하얼빈역에 내릴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둘은 이토가 어디에 내리든 반드시 우리가 의거를 성사시키겠다는 결심으로 서로 다른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하얼빈역이 아닌 차이거자우역에 이토히로부미가 내렸다면, 역사는 우덕순이라는 영웅을 더 기억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코레아우레(대한독립만세)를 외칠 때, 멀리서 거사의 성공을 확인 후 기쁨에 취해 역사(驛舍)로로 뛰어들어 함께 코레아우레를 외치다 일경에게 붙잡혀 한날한시에 재판을 받은 사람이 있다. 선생의 이름은 바로 유동하. 당시 나이 18세,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더 이해하고 싶었다. 너무나 높은, 커다란 존재로만 기억되어있는 독립운동가 분들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신적으로 형상화되어있는 그분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내려와야만 했다. 그분들의 인간적인 면모, 청년 시절, 유년시절을 알고 싶었다. 어느 직업을 가졌었고, 누구를 만났으며, 누구와 함께 생활했고, 무엇이 그들을 그런 선택으로 이끌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어느덧 그 궁금증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면모와 인생의 굴곡을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때, 가슴속에서 더 큰 공감과 존경심이 들었고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짐을 깨달았다. 사람이 결심하고 변화하며 성장하는 데는 강력한 이벤트가 필요한데 그 이벤트는 깊은 수준의 공감과 함께 발생한다. 정리해보면, 수많은 위인과 영웅들의 인간적인 다른 면들에 대한 이해가 동반될 때, 우리는 그분들과의 심리적인 거리가 더 가까워지고, 더 깊은 공감과 함께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나만의 것, 나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 국민에게 전할 수 있는 플랫폼을 기획했고, 남녀노소 모두가 핸드폰 이용하기 때문에 비영리 역사교육 앱을 개발하게 되었고, 그 후 책을 쓰고 칼럼을 연재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이러한 민간 차원에서의 노력이 정책결정자들에게 전달되어 협력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로 역사교육 콘텐츠가 재정립되고 발전될 수 있다면, 이 나라의 가능성이라 생각하는 청년층,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많은 생각을 품으며 나와 우리는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12월 19일, 2일 차
역사의 현장, 하얼빈 역으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나름대로 역사를 좋아하고 안다는 사람들도 실제 역사의 현장에 찾아가 보는 일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독립운동가 분들의 생가, 기념관, 묘소에 일일이 찾아가 보는 것은 보통의 마음가짐으로는 행하기 어렵다.
하얼빈역,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하얼빈역과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실제 중국 하얼빈시에 도착해 하얼빈역을 찾아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늘이 도운 덕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날씨는 영하 5도 정도로 따듯했다.
아쉽게도 역이 외부 보수공사중이여서 역사내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현지 가이드분의 말을 들어보니 눈 앞에 보이는 중앙 문을 들어가자마자 거사 장소가 나온다고 말해주었다.
아쉬웠지만, 잠시나마 하얼빈역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껴입어도 추운데, 그때 얼마나 추웠을까?
나는 이렇게 여러 사람과 함께 왔는데, 그때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구 일본영사관 건물로
구 일본영사관 건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 후 여순 감옥으로 이송되기 전 잠시 수용되었던 장소다. 놀랍게도 건물은 과거의 모습이 너무나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곧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개인적으로 다음 장소가 어디인지 생각도 못 할 만큼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있었는데, 다음 장소에 도착한 후 느껴지는 한기에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온 것인지 금새 알 수 있었다.
731부대기념관[마루타 실험 부대]
살면서 한 번쯤 우리는 인체실험, 마루타실험 이러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일제가 전쟁을 목적으로 세균 무기를 연구하고 실험했으며 균을 제조한 세계 최대 규모의 유일무이한 사령부. 바로 731부대다. 이곳에 들렀을 때 유적지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또한, 우리가 답사했을 때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우리가 움직이는 동선에 맞춰 해당 사료나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음성이 한국어로 들렸다. 세균에 관한 연구, 제조, 사용 및 세균전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모든 과정의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는 명백한 증거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731부대 유적지는 일본의 대중국 식민침략, 잔혹한 약탈행위, 강제노역동원 등을 보여주는 현대사의 증거자료다. 731부대 유적지에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신 안내 가이드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준 것이 기억이 난다.
“731부대 유적지를 잘 보호하는 일은 세계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의 공동책임입니다. 저는 한국 분들이 우리 전시관에 오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 전시관이 양국 국민이 서로 교류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에-아마 모두가 그러했겠지만-건물을 나올 때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다들 한 번씩은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던 것 같다. 나도 몇 번을 속으로 욕했는지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나오자마자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가야 했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현지 가이드 분께서는 앞으로 차로 30분은 이동해야 하는데 731부대에 대한 생각을 그사이에 좀 지워버리라고 조언하셨다. 밥맛이 떨어져 식사가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오랜 경험상 그러하다고 말해주셨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하얼빈서역에서 대련북역까지 고속철(KTX)를 타고 4시간을 달렸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잠에 곤히 빠졌다.
12월 20일 3일 차
아침에 눈을 뜨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터였다.
이곳에서 간략한 역사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우리는 바로 려순으로 이동했다. 과거에는 려순과 대련은 각각 시였는데, 지금은 려순(여순) 지역이 대련시에 통합되었다. 려순…. 이 얼마나 근현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아련함을 주는 장소란 말인가! 이회영, 신채호, 안중근 의사가 구금되고 마지막 형장의 이슬이 될 때까지 계셨던 바로 그 장소. 려순감옥과 관련돼서는 수많은 사료가 존재한다.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서는 1만5천 건 이상의 항일투사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실제 수용돼 고문을 받은 항일투사는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되어있는 독립운동가의 수가 전부 다 합쳐 1만5천 명 정도인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조국의 혼들이 이곳에 계셨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건물 안 이어서라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거운 공기와 냉기는 감옥 내부를 돌아보는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다. 서대문 형무소와 똑같은 형태의 감시 구조로 되어있는 이곳을 나는 쉽게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발걸음이 참 무거웠다.
나는 감옥 내부를 최대한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방마다 걸려있던 명패를 하나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독립운동의 기억 하나, 조각 하나라도 더 찾아내어 남기고 기록하고 싶었다. 그 노력의 일환이 아래 사진이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었다. 저기 있는 번호 중 하나에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선생이 있었다.
내가 언제 또 이곳 려순감옥에 찾아와 이들의 이름을 카메라에 담을 기회가 있을까 싶었다. 나는 이 순간이 너무 중요했다. 하나하나 카메라에 명패를 담으며 방 내부를 바라보았다.
비좁은 방 안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수용되는 구조, 결국 발을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서로 뒤엉켜 자야 하는 감옥, 당시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에 항일투사들은 따듯한 옷 한 벌 입지 못하고 하루에도 3번씩 아침-점심-저녁 알몸 상태로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장애물 넘기를 하며 자신의 번호를 외쳐야 했다. 신체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알기 어려운, 독립운동가 2분을 발견했다.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하셨던 독립투사 2명의 일대기가 여순시와 독립기념관에는 잘 정리가 되어있었지만, 정작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은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이 분들의 이름은 유상근, 최흥식 선생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을 나서고 걸어가는데 오른쪽에 쓰여있는 건물의 팻말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